본문 바로가기

세상톺아보기-칼럼

비상시국과 장·차관 골프 권장

   ‘장차관 모두 사드 예정지인 성주 롯데골프장에서 쳐라. 경제도 살리면서 바로 옆 사드예정지를 보면서 국가안보도 한 번씩 이야기하고...재밌겠다.’ ‘이런 대통령과 장차관을 보니 비상시국은 맞네.’ ‘미국 대통령은 비상시에도 보좌관들과 골프를 열심히 친다. 앞으로 우리 장차관들도 산적한 민생문제 해결과 창조경제 활성화를 위해 근무시간에 많은 시간을 내어 열심히 골프를 치기 바란다.’

 

  ‘북핵과 지진은 골프로 대응하는군요. 아무 걱정 없네요.’ ‘이제 국민들은 장차관님들의 나이스 샷을 구경할 수 있겠네요. 국회 해임결의안은 무시하고 신임을 재확인한 김재수 장관은 필드로 나가는 발걸음이 날아갈 것 같겠네요.’ ‘장차관이 골프 치면 내수가 진작된다고? 역시 창조적인 발상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주말 장·차관 워크숍에서 “국내 골프에 장관들이 나서달라”고 권장한 데 이어 “골프를 친 뒤 인증 샷을 올리자”, “내수진작 머리띠를 두르고 골프장으로 가자”고 농담 섞인 화답이 있었다는 보도가 있자 실명으로 올라온 댓글들이다. 실명 댓글정책을 철저히 지키는 한 보수언론 사이트에 올라온 댓글들은 이처럼 풍자를 잔뜩 머금었다.

                                                                                


 정색을 하고 꼬집는 글도 수없이 많다. ‘국민과 야당에는 비상시국이라고 엄포를 놓더니 대통령과 장차관은 태평성대네. 세상에 이런 비상시국도 있나.’ ‘골프장 운영하는 사람들이 서민인가? 남는 돈 있으면 차라리 농수산식품 사서 불우이웃한테 보내는 것이 옳지 않나? 대통령이나 정부나 많이 가진 자 입장만 생각하는구나.’ ‘지진으로 걱정이 태산 같은 지역 주민들이 이 뉴스를 보고 어떤 생각들 할까?’ 여느 무기명 댓글과 달리 비속어 없이 훨씬 노골적이고 따끔하게 지적하는 글들도 적지 않다.


 조금 많은 글을 소개하는 까닭은 하나같이 국민의 심경을 가감 없이 대변하는 듯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사이트에는 정치기사나 칼럼에 종북 타령을 하거나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판하는 분들의 댓글이 주로 올라오곤 해서 이런 반응은 이례적으로 보인다.


 그러고 보니 지난 8월 이정현 대표 등 새누리당의 새 지도부를 초청한 청와대 오찬에 송로버섯, 샥스핀, 철갑상어알 샐러드 같은 세계 최고급의 메뉴들이 즐비했다는 뉴스가 있었을 때도 이번과 흡사했다. 박 대통령은 당시 “당정청이 하나가 돼서 오로지 국민만 보고 앞으로 나아갈 때, 국민의 삶도 지금보다 더 편해질 수 있고, 나라도 튼튼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살인적인 폭염이 지속돼 온열증 사망자가 속출하고, 서민들은 ‘전기 누진세 폭탄’이 두려워 에어컨도 마음 편히 켜지 못할 시기였다. 청와대는 야당과 언론이 음식재료로 조금 쓰인 것을 침소봉대한다고 해명했지만, 사려 깊지 못한 처사였다는 게 중론이었다.

                                                                                

     
 골프 얘기도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길지 모르지만, 국민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는 걸 수많은 댓글들이 방증한다. 다른 자리도 아니고 3년여 만에 처음 대통령과 장차관 전원이 참석해 비상시국의 국정운영을 논의하는 워크숍과 만찬장에서, 그것도 장소를 바꿔가며 길게 나눈 이야기들이라니 귀를 의심하게 한다. 박 대통령은 바로 그 자리에서 “비상시국에 형식적 요건도 갖추지 않은 농식품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유감스럽다”며 야당을 비판했다.


 송로버섯, 샥스핀 메뉴가 그렇듯이 골프 얘기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메시지가 담겼다. 박 대통령은 올 들어 이미 몇 차례 공직자 골프를 권장한 적이 있다. 유일호 경제부총리가 경제5단체장과 골프장에 갔던 사례를 언급할 때 그랬으며, 언론사 편집·보도국장 간담회에서도 공직자들이 골프를 자유롭게 쳐 내수위축이 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모든 것은 때와 장소가 있는 법이다. 박 대통령이 북한 핵과 경제위기 때문에 ‘비상시국’으로 규정한 상황에서 장차관들에게 골프를 자주 치도록 권고한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비판이 나온다. 서민들의 인식과 동떨어진 것임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게다가 일부 장관들이 청소년들이 우스갯소리로나 할 수준의 화답을 했다니 현실감각이 그렇게도 없느냐는 힐난이 나올법하다. 국민이 주시하는, 비상시국을 논하는 자리에서는 농담 한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아야 하는 게 정부 최고지도자들의 도리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