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은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공식적으로나 비공식적으로나 만난 증거가 남아 있지 않다. 대통령이 되기 전에는 물론 취임 후에도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1997년 한나라당에 입당해 정치를 시작한 지 20년이 가깝도록 피해자 할머니들을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가 야당 대표, 여당 대표, 대통령을 모두 지내는 정치지도자여서다.
박 대통령이 정계에 발을 들여놓은 1997년은 공교롭게도 국내에서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증언해 공론화한 김학순 할머니가 소원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던 해다.
김 할머니는 타계 직전 인터뷰에서 마지막 소원을 이렇게 털어놓았다. “일왕으로부터 직접 진심어린 사과를 받아야겠다.”(인터뷰 당시 김학순 할머니는 ‘천황’이 아닌 ‘일왕’이라고 표현했다.)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 가운데 이제 41명뿐인 생존자들의 소원도 일본 정부의 진정한 사과를 받아내는 것이다.
이들의 뜻과 달리 박근혜 정부는 지난해 12월28일 한일 간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합의에 따라 일본 정부가 출연하는 10억 엔으로 ‘화해 치유 재단’ 설립을 막무가내로 강행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피해자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전혀 들어보지도 않은 채 아베 신조 일본총리와 덜컥 합의해 놓고 역대 대통령들이 해내지 못한, 어려운 일을 이뤄냈다고 뿌듯해 한다.
“이번 합의는 피해자분들이 고령이시고 금년에만 아홉 분이 타계하시어 이제 마흔여섯 분만 생존해 계시는 시급성과 현실적 여건 하에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이뤄낸 결과다.” 일본 정부가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진정한 사과도 없어 피해자들이 절대로 받을 수 없다는데도 ‘더없이 좋은 선물’이라며 떠안기는 꼴이다.
그럼에도 박 대통령은 합의를 비판하면 ‘무책임한 선동’이라고 몰아붙인다. 어설프게 봉합해 피해자와 국민의 가슴에 상처를 덧낸 것을 업적이라고 자랑할 게 아니라, 차라리 다음 정부의 과제로 넘기는 것이 지혜로운 처사였다. 피해자들과 다수 국민이 지금이라도 합의를 원천무효화하고 재협상을 바라는 건 이 때문이다.
협상의 상대가 있어 최상의 결과를 얻어내지 못했다면,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가거나 청와대로 모셔 밥 한 끼라도 대접하면서 설득하는 노력을 기울이는 게 지도자의 기본 도리다. 이처럼 민감하고 엄중한 사안을 협상 주역도 아닌 여성가족부 장관을 추석 명절에 임박해 보내 피해자들의 반발만 부추겼다.
박 대통령이 피해를 당한 국민에게 유독 매정하고 냉혹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에게 이르면 극에 달한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 규명을 요구하는 피해자들을 마치 ‘정권의 적’처럼 취급한다. 아무리 대통령에게 트라우마 같은 존재라해도 300여 명 희생자와 그 유족에게 이처럼 비정해도 좋은지 궁금하다.
특별검사 약속은 공수표가 됐고,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도 있으나마나 한 기구로 만들어 버렸다. 아니 방해공작만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모든 것을 세월호 피로감과 국민세금 탓으로 몰아간다.
세월호 유족 대표들의 면담 요청은 번번이 거절당했고, 분노와 슬픔은 정부의 가이드라인을 넘으면 국가발전의 저해요소로 취급당하고 있다. 책임은커녕 외려 ‘피해자 코스프레’에 열심인 듯하다. 박 대통령의 최근 발언을 보면, 자신의 부모가 비명에 목숨을 잃은 것은 고통이 절절한 반면, 꽃 같은 나이에 떼죽음을 당한 세월호 희생자와 유족들에게는 매정하기 그지없다.
지난해 말 시위집회에서 경찰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백남기 농민만 해도 그렇다. 70에 가까운 노인이 경찰 물대포를 맞고 1년 가까이 사경을 헤매는데도 누구 하나 찾아가 보거나, 유감 표명이 없는 나라를 민주국가라고 할 수 있겠는가.
자신에게 충성스럽지 않은 비박계 정치인들에게 레이저 빔을 쏘아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힘없는 국민들에게 그토록 몰인정한 모습을 지켜보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 같은 따뜻한 ‘어머니(무티) 리더십’은 아니더라도, 가장 힘없는 서민들에게 매몰찬 대통령이라는 수군거림은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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