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상표처럼 ‘법과 원칙의 대명사’를 자처해 온 박근혜 대통령이 너무나 이중적이라는 사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젠 ‘법과 원칙’이란 말을 입에 올리기 면구스러운지 아예 두 단어를 언급조차 하지 않은 지 오래다.
국회의 인사청문 경과보고서 채택거부에도 박근혜 대통령이 음주운전 사고를 은폐한 이철성 경찰청장 임명을 강행했다는 기사가 올라오자 이런 댓글이 줄을 이었다. ‘아~이게 박근혜식 법과 원칙이지. 경찰이 음주 운전해도 영전하고~ 공무원인 게 알려지면 징계 받으니 그 사실을 숨겼는데도 영전하고.’ ‘박근혜 정부 그들만의 법대로 원칙대로’.
듣기 민망하게도, 이 청장은 취임사에서 “일상생활에서 법을 지키는 것이 자신과 공동체 모두에 도움이 된다는 인식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면서 “원칙이 상식이 되고 신뢰가 넘치는 ‘건강한 공동체’를 만드는 데 힘을 쏟자”고 역설했다.
이 청장 임명강행은 박근혜 정부 들어 인사청문회를 요식 행위로 만든 아홉 번째 사례다. 자진 사퇴 같은, 손꼽기 어려운 인사낙마사고를 제외하고도 그렇다. 박근혜 정부의 청와대에서 치안비서관을 지낸 대통령 측근인데다, 인사검증의 총책임자인 우병우 민정수석비서관과도 막역한 사이가 아니었다면, 이 청장이 올라갈 나무였을까 싶다.
김재수 농림축산부 장관 후보자가 고위공직자 시절 서울 근교의 93평짜리 아파트에서 전세금 1억9000만원에 계약 갱신 없이 7년간 거주한 사실은 계약 갱신 때마다 천정부지로 오르는 차액을 구하기 위해 애간장을 태우는 서민의 눈에는 이만저만한 특혜가 아니다. 김 후보자가 농협은행에서 네 차례에 걸쳐 총 8억5천만 원이나 대출받아 일부를 대출목적과 달리 부동산구매에 유용한 의혹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그는 아무 일도 없는 듯 장관자리에 앉을 것이다.
‘증여세 탈루’ 의혹을 받은 전 현오석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편법 군복무 논란에 휘말린 전 정종섭 안전행정부 장관, 명백한 불법인 위장전입이 불거진 전 강병규 안전행정부 장관, 법인카드를 가족 생일 등에 사적으로 사용해 도마에 오른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도 부적격 판정을 무릅쓰고 임명됐다. 김진태 전 검찰총장 역시 삼성 떡값과 부동산 투기 등의 의혹으로 경과보고서 채택이 불발됐던 인물이다. 미국에서라면 인사청문 대상자가 될 수도 없는, 진정한 ‘부패기득권세력’이 대통령의 눈에 들어 무사통과했다.
우병우 수석의 경우는 훨씬 차별적인 ‘법과 원칙의 이중잣대’다. 박근혜 정권 초기 국가정보원 대통령선거 댓글 사건을 법과 원칙대로 수사했던 채동욱 전 검찰총장을 무리하게 찍어낸 것도 모자라 주변까지 속속들이 조사한 사례와 비교하면, 우 수석은 한층 엄격한 잣대로 수사를 받아야 마땅하다.
채 전 총장의 ‘혼외아들 의혹’이 불거졌을 당시 내세운 도덕성 기준을 적용하면 우 수석의 문제는 더욱 심각하기 때문이다. 같은 기준이라면 법적으로 문제 삼기 어려운 사생활 문제로 법무부 감찰을 받은 뒤 물러난 채 전 총장과 달리 우 수석은 불법 의혹의 한가운데 서 있다.
채 전 총장관련 수사대로라면 우 수석 처가의 강남 부동산 매매, 탈세·횡령, 화성 땅 농지법 위반도 모두 수사대상이 돼야한다. 우 수석 아내의 차명 땅 보유 와 재산신고 누락은 우 수석의 공직자윤리법 위반의혹과도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통령의 수사 가이드라인은 이를 무력화할 게 뻔히 보인다.
어버이연합 게이트에 연루된 청와대 관련자 고소·고발 사건, 이정현 새누리당 대표(전 청와대 홍보수석) 등 정권 실세들의 선거법·방송법 위반 사건 같은 일들은 한결같이 수사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국가정보원 대선 개입 사건, 청와대 비선 실세 국정농단 의혹, ‘성완종 리스트’ 사건 수사도 사실상 대통령의 가이드라인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법치주의 농단’이나 다름없다.
솔선수범은 고사하고, 반칙과 탈법·불법·위법·편법을 일삼아도 충성심만 보이면 고위공직에 발탁될 수 있는 풍토가 대한민국 공직자들에게 주는 신호는 명확하다. 위장전입, 병역비리, 탈세, 부동산 투기가 ‘인사청문회 4대 필수과목’에 포함된 된 것이야말로 ‘국기문란’이 아니고 뭔가.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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