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잔하게 폐부를 찌르는 영화 ‘동주’를 관류하는 단어는 ‘부끄러움’이다. 일제 강점기 일본 유학을 위해 어쩔 수없이 창씨개명한 윤동주 시인은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부끄러움을 안고 산다. 식민지 지식인은 시로 세상을 바꿀 수 없음을 참담해 한다. 동주는 행동하지 않고 시를 써야 하는 자신에게 부끄러움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행동하는 지식인 고종사촌 송몽규는 동주에게 부끄러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청년 동주를 만난 시인 정지용은 이렇게 말한다. “부끄러움을 아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부끄러운 거지.” 그래서 영화는 부끄러움을 일깨워준 영혼의 거울로 승화한다. 사람이 금수(禽獸)와 다른 점의 하나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지닌 것이라고 맹자가 일찍이 사단설(四端說)에서 가르친 까닭도 여기에 있는 듯하다.
<윤동주 '서시' 육필원고>
후안무치(厚顔無恥)의 상징인 우리네 정치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인이 윤동주라는 사실은 참으로 역설적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로 시작하는 ‘서시’는 정치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라는 통계까지 나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래전부터 윤동주의 ‘서시’를 좋아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개인의 자아성찰이 역사와 민족의 현실에 대한 성찰로 인식을 확대한 데 깊은 감명을 받는다. 가끔 내 마음이 흔들릴 때마다 이 시를 낭송하며 마음을 다잡는다. 무엇이 도리인가, 스스로에게 한 점 부끄럼이 없고 바른 길을 걷기 위해 마음을 추스르는 자세를 갖는다.” 20대 국회의원 총선거 대구 수성갑에 출마한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도 이 시를 가장 좋아한다고 털어놨다.
막말 소동 끝에 인천 남구을 지역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한 ‘진실한 사람’ 윤상현 의원조차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서시’를 인용했을 정도다. 불법정치자금을 받고 검찰청에 수사를 받으러 오는 정치인들은 하나같이 윤동주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포토라인에 선다. 그 순간 국민은 ‘저 사람은 끝났군’ 하고 짐작한다. 지난해 말 의원직을 박탈당한 박상은 전 새누리당 의원도 “돈에 있어서만큼은 정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럽지 않다”고 장담했지만 최종판결은 부끄러웠다.
한국 정치사상 최악의 공천파동을 겪은 정치인들이 온갖 부끄러움을 나 몰라라 한 채 지난 주말부터 총선거전에 공식적으로 돌입했다. 국회의원 후보들은 이제 지키지도 못할 공약을 남발하고 자신이 최고라고 외치다가 그에 함몰돼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게 되는 ‘리플리 증후군’에 사로잡히게 될 게다. ‘리플리 증후군’은 정치인에게 가장 많이 나타나는 경향이 짙다. 국민을 위한 일보다는 자신의 영달을 위해 허언을 일삼지만, 진짜라고 스스로 믿는 게 정치인이다.
선거대책위원장들은 우리 당 후보만이 국민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다고 공언(空言)한다. 가장 혼란스러운 건 과거 보수 정당의 핵심 대선공약을 만든 사람이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정당을 지휘하는 선거대책위원장이 되고, 진보 정당 대통령의 핵심 정책입안가가 보수 정당의 선거대책위원장으로 옷을 바꿔 입었다는 사실이다.
이번 선거에서는 ‘진실한 사람’의 기준도 다르다. 진짜 진실한 사람이 아니라, 진실한 사람을 뽑아달라고 한 분의 말을 곧이곧대로 따르기만 하는 후보가 진실한 사람이다. 마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의 주인공 윈스턴 스미스가 근무하는 진리부를 연상시킨다. 진리부는 진실을 기록하는 부서가 아니라 과거 사실을 빅브라더의 입맛에 맞게 조작하는 일을 담당하는 부서다.
유감스럽게도 리플리 증후군을 앓는 사람에게는 거짓말 탐지기도 통하지 않는다. “부끄러움을 알면 정치인이 아니지” 하고 체념하면 그만일까. 그런 리플리들을 유권자가 믿어 준다는 데 심각성이 도사리고 있다. 다수의 유권자는 이번에도 허망한 공약을 하든 말든 평소 선호하는 정당의 후보만 찍을 것이다. 크게 보면 유권자는 언제나 오만한 정당을 심판하는 현명함을 발휘한다지만, 여론조사를 보면 아직 멀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부끄러운 일을 했으면 최소한 부끄러운 척은 하는 정치인을 뽑는 날은 올수 있을까.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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