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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톺아보기-칼럼

금반지 대신 금수저, 돌잔치 선물 변화의 정치사회학

 풍습은 세태를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 사회에서 오랫동안 아기 돌잔치 선물로는 금반지가 대세였다. 여기에는 아기가 건강하게 자라라는 소망과 음양오행의 지혜가 담겼다. 아이들은 발육 상태가 좋아 오장육부 가운데 간과 쓸개가 매우 강하다. 오행의 목(木) 기운이 넘친다는 의미다. 하지만 목의 기운이 지나치게 강하면, 위장의 기능이 약화돼 모유조차 토하는 부작용이 생긴다. 금반지를 몸에 지니면 금(金) 기운으로 목 기운을 낮출 수 있다. 훗날 돈이 필요하면 요긴하게 쓰라는 다목적 의미도 내포됐다.


 최근 들어 아기 돌잔치나 백일잔치 때 흔히 선물하는 금반지보다 금수저의 판매량이 많아졌다고 한다. 언론조차 주목하지 못한 세태변화다. 지난해 최고의 신조어로 꼽힌 ‘금수저·흙수저’가 낳은 상술의 산물인데다 배경을 캐 들어가 보면 더욱 달갑지 않다.


 ‘아기에게 금수저 쥐어주세요.’ ‘금수저는 물고 태어나는 게 아닙니다. 건강하게 잘 먹고 잘 자라라는 의미에서 쥐어주는 것입니다.’ 귀금속상들의 홍보 문구는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양극화가 빚은 서민층의 상대적 박탈감을 겨냥하고 있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게 할 형편은 못되지만, 상징적인 작은 금수저라도 손에 쥐어주고 싶어 하는 부모들의 애틋한 심정을 자극한다.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다’는 말은 세계 어디에서도 없었던 것이지만, 2015년 어느 순간 패러디를 통해 한국 사회의 공감 유행어 1순위, 빅데이터 키워드 1위로 자리 잡았다.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는 관용구는 과거 유럽 부유층이 은식기를 주로 쓰면서, 태어나자마자 유모가 은수저를 이용해 젖을 먹이던 풍습에서 유래했다.


 우리 청년들은 부의 대물림을 상징하는 패러디로 재탄생시켜 ‘금수저, 은수저, 동수저, 흙수저’의 계급 세분화를 만들어냈다. 수저별 기준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나, 청년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수저 기준을 제시한다.

 

  한 인터넷 사이트에 올라온 수저 구분표가 눈길을 끈다. 자산 20억 원 이상이며 가구 연수입이 2억 원 이상이면 상위 1퍼센트의 금수저다. 자산 10억 이상이고 가구 연수입이 8,000만 원 이상이면 은수저다 상위 3퍼센트가 여기에 속한다. 자산이 5억 이상이며 가구 연수입이 5,500만 원 이상이면 상위 7.5퍼센트의 동수저, 자산 5000만 원 미만이고 가구 연수입이 2000만 원 미만이면 흙수저에 해당한다.

                                                                                  


 요즘 핫 이슈로 등장한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 부정입학 의혹사건은 ‘금수저 아들을 키우는 것은 팔 할이 아버지의 이름’이라며 서정주의 시 ‘자화상’을 인터넷 풍자 호재로 삼았다. 로스쿨 입시생의 자기소개서가 법조인으로 이름을 날렸던 ‘아버지 소개서’나 다름없다는 걸 차갑게 비튼다.

 

  2018년 대입 학생부종합전형의 ‘금수저 입시’ 논란도 흡사하다. 일자리에도 기득권층의 현대판 음서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재벌 3~4세들의 갑질 행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와 국민적 공분과 상대적 박탈감이 하늘을 찌르는 듯하다.


 ‘흙수저도 쉽게 금수저가 될 수 있다, 게임 속에서만’ 같은 서글픈 해학과 가슴 아린 익살도 홍수처럼 터져 나온다. 서울대생이 ‘생존을 결정하는 것은 수저 색깔’이라는 유서를 쓰고 자살하는 일도 벌어졌다. 수저론이 심각한 건 흙수저가 흙수저가 되고 금수저는 금수저가 되는 차원을 넘어 흙수저의 비중이 날이 갈수록 커지기 때문이다.

                                                                                   


 4·13 총선 때 야당들이 ‘흙수저도 노력하면 금수저가 될 수 있도록 공정한 사회를 만들어 가겠다’고 약속했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봐야할 것 같다. 이같은 정책공약들이 과거처럼 소득 불균형 완화 수준에 그친다면 실망감을 떨치기 어려울 게다. 내년 말로 다가온 19대 대선에서 고착화돼 가는 불평등 구조를 타파하는 구체적 해법을 제시하지 못하는 지도자는 당선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만큼 계층 이동 사다리 복원과 양극화 해소는 절박한 시대정신으로 부상했다. 경제·사회적 불평등의 심화는 민주주의 기능도 약화시킨다는 전문가들의 경고가 끊이지 않는 점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정부와 정치권이 수저론을 소낙비처럼 지나가는 사회문제로 취급했다가는 다음 선거에서 낭패를 보고 말 것이다.

                                                                           이 글은 내일신문 칼럼에 실린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