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미인들이 죽어서 런던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힌다는 건 최고의 영예다. 그런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힌 걸 더 영광스럽게 여긴 미국인이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외국인묘지에 잠들어 있는 호머 헐버트 박사(1863~1949)다.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하고, 자신의 조국보다 한국을 위해 더 헌신했던 인물’로 불리는 까닭이 그의 묘비명에 오롯이 담겼다. ‘뼛속까지’ 한국을 사랑한 그는 일제에 나라를 빼앗기자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이준 열사 등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로 참석하는가하면, 고종의 밀서를 지니고 미국 대통령 면담을 시도했다. 헐버트는 일제에 맞서다 사실상 추방당하고 말았지만, 3·1운동 이후 미국에서 한인 독립단체를 도우며 불꽃을 이어갔다.
그는 한국의 역사와 지리를 배워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를 집필하고 개화를 추동했다. 헐버트가 서재필과 더불어 최초의 순한글 독립신문을 창간한 것도 그 일환이다. 입으로만 전해오던 대표적 전통민요 아리랑을 맨 처음 악보로 만들어 보급한 것도 그다.
사후에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을 받은 그의 일대기가 한국인의 손으로 어연번듯하게 정리돼 나온 게 60주기를 넘긴 2010년 여름이라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나마 국제금융인이자 헐버트박사기념사업회 회장인 김동진의 오랜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선교사이자 독립운동가, 교육자이자 한글학자, 언론인이자 역사학자로서의 진면목이 그제야 세상에 드러났다.
책을 읽는 내내 감명과 동시에 불편한 마음이 떠나지 않는다. 지금도 친일행위를 사과하기는커녕 사실인정조차 하지 않으려는 무리들이 떠올라서다. 그러고 보니 아동문학가 권정생 선생은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다. “읽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책이 좋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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