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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민주주의 추동력 ‘다원주의’

 

나치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고 자부하는 독일 정치학자 카를 슈미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국제전범재판소 심문과정에서 이렇게 털어놓았다. -아돌프 히틀러가 하나의 국가사회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고, 당신 역시 하나의 민족사회주의를 갖고 있었다는 말인가요. “히틀러보다 내가 우월하다고 느꼈습니다.” -당신이 진정 그렇게 느꼈다는 말인가요? “정신적으로 무한히 우월합니다.”

이런 슈미트가 학문적으로, 그것도 전 세계에서 부활하고 있다면 일단 의아해할 것이다. 하지만 현실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 서구 정치사상 연구에서 슈미트의 지적 영향력은 가히 세계화 수준이라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의 정치적 토양이었던 신보수주의자들을 비롯한 우파진영에 필수적인 참고 대상이었던 것은 물론 일부 좌파 진영학자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이해영 한신대 교수의 표현대로라면 슈미트의 사상과 저작 자체가 갖는 ‘악마적 매력’ 때문이다.

슈미트 사상의 고갱이인 ‘정치적인 것’이란 개념의 활용도는 무진한 것 같다. 슈미트는 <정치적인 것의 개념>(법문사) 등에서 정치적인 것의 판단 기준으로 유명한 ‘친구와 적의 구별’을 제시한다. 이때 적은 사사로운 적이 아니라 공공의 적이다. 적과 동지의 구별이 없게 되면 정치생활도 없어진다는 것이다. 슈미트는 갈등과 적대를 본질로 하면서 절대 길들여질 수 없는 인간 본성을 ‘정치적인 것’으로 규정했다. 슈미트의 논리는 모든 것=정치적인 것=우적(友敵) 구분=논쟁적인 것이라고 해도 좋겠다.

벨기에 출신의 진보적 정치철학자 상탈 무페는 슈미트가 자유주의 정치철학을 비판하면서 사용한 개념인 ‘정치적인 것’을 적극 차용한다. 무페는 책의 제목까지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이라고 했을 정도다. 무페는 슈미트의 총론에는 거부감을 보이면서도 각론으로서는 받아들여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해소하는 데 ‘정치적인 것’이 절실하다고 주장한다. 정치(politics)와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은 구별된다. ‘정치’가 대의제라는 제도장치를 통해 작동하는 것이라면, ‘정치적인 것’은 일상의 다양한 이슈를 중심으로 작동한다고 보면 될 것 같다. 이를테면 풀뿌리 민주주의는 ‘정치’보다 ‘정치적인 것’을 통해 더 잘 구현된다고 할 수 있겠다. 정치가 정책 결정과 연관되는 반면 ‘정치적인 것’은 레짐이나 패러다임과 상관되기도 한다.

무페가 슈미트와 갈라서는 지점은 다원주의다. 무페는 에티엔 발리바르 등과 더불어 슈미트의 ‘정치적인 것’의 개념을 수용하지만 다원주의를 끝까지 옹호하는 점에서는 차이를 드러낸다. 무페는 적대와 갈등의 장(場)인 ‘정치적인 것’을 사고하지 못하는 자유주의의 맹점을 비판하는 한편 급진적이고 다원적인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좌파의 공간을 찾는다.

무페의 ‘정치적인 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는 정치의 과잉이 아니라 다양성 정치의 부족이라는 관점이다. 무페의 사상은 정치의 의미를 애써 축소하고 여론의 다양성과 다원주의를 못마땅해 하거나 불편해 하는 이명박 정부가 수용하고 싶지 않을 게 분명하다. 사회갈등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보다 애써 덮어놓으려는 게 자유주의 정치철학이다. ‘정치적 구호의 배제’를 선호하는 보수정치권은 여러 의견들이 공존하고 공론화되는 다원주의 사회가 아니라 모든 게 경제의 문제로 귀결되는 일원주의 사회를 원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 체포나 여권이 일방적인 처리 의중을 버리지 않고 있는 언론 관련법에 대한 생각만 봐도 그렇다.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은 1987년 체제 이후 제도화만으로 민주주의가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착각·오해하는 한국적 정치 현실에 일침을 가하는 것이기도 하다. “유토피아에도 정치적인 것이 있다”는 명구가 이때 딱 어울리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