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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한민족 기질과 닮은 ‘소나무’

 

조선 세조 때 시서화 삼절로 칭송받은 강희안은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꽃과 나무를 9품계로 나눴다. 그 가운데 소나무는 대나무, 국화, 연꽃과 더불어 제1품계에 올라 있다. 솔의 빼어난 운치와 절품의 풍치를 높이 산 것이다. 하긴 일찍이 사마천이 <사기>에서 송백을 일러 ‘백목지장(百木之長)’이라 했으니 이보다 극찬이 또 있을까.

송(松)이라는 한자에는 진시황과 얽힌 전설이 내려온다. 진시황이 길을 가다 소나기를 만나 소나무 아래서 비를 피할 수 있게 되자 이를 고맙게 여겨 공작의 벼슬을 내려주고 목공(木公)이라 불렀다. 나중에 두 글자가 합쳐져 송(松)자가 됐다는 후일담이 전해온다.

중국의 <유몽영>(幽夢影)에도 “하루의 계획으로 파초를 심고, 한 해의 계획으로 대나무를 심으며, 십년 계획으로 버들을 심고, 백년 계획으로 소나무를 심는다”고 했을 정도로 소나무를 받들었다.

우리 선조들은 소나무를 지조·절개·충절의 상징으로 여겼으니, 대나무·매화와 더불어 ‘세한삼우(歲寒三友)’라 숭앙하지 않았던가. 옛 선비들은 위엄이 있고 당당함이란 뜻을 지닌 ‘늠렬(凜烈)’이란 글자를 소나무에 헌정하기도 했다. 자신의 충절을 낙락장송에 비긴 시조를 읊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성삼문, 꼿꼿한 선비정신을 구현한 <세한도>의 추사 김정희가 대표주자들이다. 양희은의〈거친 들판에 푸른 솔잎처럼>, 안치환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가 보여주듯 엄혹한 시절에는 민주화운동의 민중가요로 빛났다.

한민족에게 소나무는 오랫동안 삶과 죽음을 잇는 영원의 수목이다.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집이 되고, 땔감과 약이 되었다가 죽은 뒤엔 관이 되어 우리와 함께 묻히는 소나무다. 벼랑 끝의 바위틈이나 바닷가 모래땅 같은 척박한 풍토에도 뿌리를 내리고 풍상에 시달릴수록 의연하고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소나무는 한민족의 기질과 빼닮았다. 산림청에서 10년마다 실시하는 ‘우리 국민의 산림에 대한 의식조사’에서 지난 30년 동안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나무로 자리를 지켜온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에서 자라는 나무 중 우두머리라는 오랜 믿음 때문에 궁궐에서는 애오라지 소나무만 썼다. 청와대 조경수 가운데 소나무가 유독 많은 것도 마찬가지다.

한·중·일 문화코드읽기 시리즈의 하나로 이어령이 책임 편집을 맡은 <소나무>(종이나라)는 동양 3국의 소나무 문화와 역사를 자별나게 비교한다. 무엇보다 사람과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우리나라 소나무의 상징성을 다각도로 조명하고 있다. 어떤 식물학자는 소나무를 제대로 안다면 우리나라 나무 중 3분의 1을 아는 셈이고, 소나무의 사촌쯤 되는 잣나무를 알면 3분의 2를 아는 셈이라고 한다. 그만큼 소나무와 잣나무가 흔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종교와 사상으로 보는 소나무, 문학과 설화로 보는 소나무, 그림과 도자, 민화와 조각으로 보는 소나무, 생활 속에서 보는 소나무 같은 흥미로운 얘깃거리가 옹골지다.

일본 상징나무의 하나도 적송(赤松)이라지만 한반도에서 전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좋은 예의 하나로 교토 고류사에 있는 일본 국보 1호 ‘목조미륵반가사유상’이 신라 사람에 의해 신라 소나무로 조각된 것이라는 점을 든다. 일본은 이 사실에 대해 침묵하고 있지만.

사흘 후면 화재 한 돌을 맞는 숭례문 복원을 위해 강원 삼척 준경묘 일대의 금강송을 베어낼 때 보았듯이 어명(御命)을 동원하고 고사 의식을 치러줄 정도로 우리 모두가 소중하게 여기는 게 소나무다. “추운 겨울이 온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르름을 알 수 있다”고 한 공자의 말대로 계절적으로나, 시대적으로나 엄동을 통과하고 있는 요즘처럼 세상이 엄중할수록 돋을새김되는 소나무의 개결함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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