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04.10 17:37
숙명적인 맞수였던 미국의 존 애덤스 2대 대통령과 토머스 제퍼슨 3대 대통령처럼 특별한 인연도 드물다. 제퍼슨은 애덤스 밑에서 부통령으로 일했지만 도와주기는커녕 발목잡기 일쑤였다. 대통령 선거에서 2위를 한 후보가 부통령이 되는 제도였던 데다 애초부터 정책노선이 달랐기 때문이다. 다음 대선에선 애덤스와 대결해 당선됐다. 은퇴한 뒤에는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였지만 애덤스는 죽는 순간에도 속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제퍼슨만 살아남는구먼.” 사실 제퍼슨은 이미 애덤스보다 몇 시간 전에 숨진 뒤였다. 독립 일등공신인 두 사람이 타계한 날은 공교롭게도 미국 독립선언 50주년이 되던 1826년 7월4일이었다.
세계적인 문호 윌리엄 셰익스피어와 스페인 작가 미겔 데 세르반테스는 17세기 유럽의 섬과 대륙을 대표하는 쌍벽이었다. 두 사람도 1616년 4월23일 나란히 세상을 떠났다. 1995년 유네스코가 4월23일을 ‘세계 책의 날’로 정한 데는 두 문호가 동시에 영면한 날을 기리는 뜻이 반영됐다.
흔히 20세기 자본주의 진영의 대표적인 경제학자로 존 메이너드 케인스와 하이에크를 대척점에 놓고 있지만, 폴라니와 하이에크는 또 다른 맞수다. 세계 경제가 휘청거리면서 하이에크가 퇴조하고 있는 반면 폴라니를 새삼 주목하는 학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필생의 맞수인 폴라니와 하이에크와의 질긴 인연은 러시아혁명과 사회주의의 득세로 상처를 입은 시장론자들이 ‘자유’를 외치면서 시작됐다. 폴라니는 대표적인 시장론자인 루트비히 폰 미제스와 그의 수제자 하이에크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학파의 시장만능주의에 신랄한 비판의 화살로 맞섰다. 하이에크의 주류경제학이 오랜 세월 신자유주의 세계경제의 구세주로 군림해오는 동안 비주류인 폴라니의 사상은 비록 응달에 머물러야 했지만 끈질긴 생명력을 이어왔다.
경제학자들의 노선을 근원적으로 구분하는 기준이 시장에 대한 태도라면 하이에크는 시장이 스스로 혁신을 만들어낸다고 확신했다. 그는 <노예의 길>에서 국가개입에 의한 계획경제가 국민들을 노예의 길로 이끈다고 주장한다. 모든 것을 시장기능에 맡기자는 철학이 담긴 이 책에서 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가 정책적 영감을 얻은 뒤 “당신이 없었다면 영국병을 치유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며 하이에크에게 생일축전을 보낸 일은 이따금 회자되는 일화다. 폴라니는 <거대한 변환>에서 ‘자기조정적 시장’을 ‘악마의 맷돌’에 비유한다. 그는 자기조정적 시장이라는 아이디어가 유토피아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그러면서 극단적 이윤추구를 위해 스스로 기능하는 시장의 무자비한 속성에 의해 인간의 살림살이가 효율성에만 지배당하는 현실을 꼬집는다. 시장에 의해 통제되는 경제란 우리 시대 이전에는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다고 폴라니는 지적한다. 폴라니는 자기조정적 시장에 의해 통합된 사회체제를 허물고 인간의 생존에 꼭 필요한 것을 생산, 분배하는 사회를 지향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케인스와 하이에크가 30년간씩 지배하고 물러난 뒤 폴라니 시대가 뒤늦게 꽃필 것이라고 예단하는 경제학자들도 등장하고 있다. 그래서 폴라니 읽기 운동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들린다. 1991년 번역 출간 후 오랫동안 절판 상태이나 때마침 오는 5월쯤 폴라니 전문가인 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의 새로운 번역본이 나올 예정이라는 희소식도 전해온다. 65년 전 탄생한 <거대한 변환>이 진정 경제사상의 ‘오래된 미래’가 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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