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재에서

지금 필요한 건?… 관용

2009.05.22 17:34  


서열이 분명한 늑대 무리에서는 우두머리를 가리기 위해 해마다 수컷들의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벌어진다. 여러 수컷이 힘을 모아 우두머리에게 도전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코 패자를 죽이지는 않는다. 승자가 송곳니로 패자의 목을 무는 시늉으로 싸움을 끝낸다. 거듭되는 싸움이 종족의 명맥을 끊을까봐 살육을 금지시킨 것이다. 식물과 동물은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 경쟁하지만, 이처럼 더불어 살기 위해 욕심을 잠재우고 관용을 베풀 줄 안다. 인간은 다른 생물을 멸종시킬 수 있는 유일한 생물이다. 프랑스 식물학자 장 마리 펠트가 쓴 <정글의 법칙>(이끌리오)의 한 토막이다.

‘관용(톨레랑스)의 나라’다운 프랑스에서 전해오는 일화에는 이런 것도 있다. 조르주 클레망소 프랑스 총리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하는 한 청년에게 저격을 당했다. 청년이 쏜 총알 일곱 발 가운데 한 발을 맞은 클레망소는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청년은 현장에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클레망소는 사형에 반대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를 감옥에서 8년간 사격훈련을 시키자고 제안했다. 자신을 저격한 범인의 사형집행을 반대하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대답했다. “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프랑스에 총알 일곱 발 중 한 발밖에 못 맞히는 청년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프랑스의 명예는 실추되었소. 그 한 방도 부상만 입히는 정도라면 부끄러운 일이요. 그에게는 사격훈련을 더 시켜 목표물을 맞힐 수 있는 프랑스 청년으로 만들 필요가 있소.”

‘관용’에 관해서는 철학자 볼테르의 명언으로 흔히 인용되는 말이 있다. “나는 당신의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당신이 그런 말을 할 권리를 누릴 수 있도록 목숨을 걸고 싸우겠다.” 이 말은 볼테르가 실제로 한 적이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그의 사상을 정리한 이블린 홀이 출간한 <볼테르의 친구들>에서 볼테르가 한 말을 인용하는 과정에서 착오가 생겼다는 게 정설이다. 어쨌거나 볼테르는 <관용론>까지 써 프랑스 관용정신의 상징적 인물이 됐다.

관용은 상대방의 시각에서 문제를 바라보며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경청하고 자기 생각이 다르거나 부족할 수 있다는 한계를 인정하는 태도다. 관용과 용서는 사촌쯤 된다. 그렇지만 관용이 곧 용서는 아니다. 관용이 되면 물론 용서가 된다. 용서가 안 되면 관용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관용은 용서를 넘어선다.

네덜란드 태생의 미국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헨드릭 빌렘 반 룬은 인류 역사를 ‘관용과 불관용의 역사’로 규정짓는다. 엄청난 지적 열정과 폭넓은 스펙트럼을 지닌 ‘르네상스적 인물’인 반 룬은 <관용>(서해문집)이라는 걸작에서 ‘관용의 정신사’를 펼쳐 보인다. 어쩌면 인류의 역사는 ‘관용의 역사’가 아니라 ‘불관용의 역사’라 해야 할 듯하다. 인류가 그나마 ‘관용’의 품속으로 들어오게 된 것도 기나긴 역사 속에서 최근 몇 세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관용을 획득하기 위한 인간의 투쟁, 종교적 신념이 낳은 무자비한 불관용이 파노라마처럼 전개된다. 로마 집정관 심마쿠스, 율리아누스 황제, 에라스무스, 라블레, 볼테르, 디드로, 스피노자, 레싱 등 다른 역사책에서는 소홀히 다뤘던 많은 인물들이 ‘관용의 영웅’으로 승화한다.

우리는 요즘 들어 부쩍 힘의 억압이 만연하고 상대를 인정하지 않는, 최악에 가까운 ‘관용결핍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촛불 시민과 시위·집회엔 철퇴를 내리는 반면 국민의 혈세를 마구 낭비한 공직자나 공공기관엔 솜방망이로 관용을 베푸는 괴이쩍은 일들도 다반사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긴요한 덕목이 바로 참된 관용이다. 자기 신념에 대한 자신감과 타인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만이 관용의 정신을 올곧게 갈무리할 수 있다. 관용은 상대를 내편으로 만드는 비법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관용을 인간에 대한 가장 겸손한 형태의 사랑이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