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마리의 쥐를 배전망 위에 함께 올려놓고 전기충격을 가하면 서로를 공격한다는 실험결과가 있었다. 고통을 느끼는 쥐들이 상대방에게서 잘못을 찾으려는 본능이 발동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긴 전설적인 야구 영웅 요기 베라도 공이 잘 맞지 않을 때는 야구 방망이를 탓할 뿐이라고 고백한 적이 있다. 자기 실수로 망치를 손가락에 내리친 사람이 망치에 화풀이를 하듯이.
“불행한 사건 이후에 사회는 희생양을 절실히 요구한다. 만인의 죄를 뒤집어쓰고 광야로 보낼 사람을 찾아 위안을 얻으려 한다.” 미국에서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 여름 어느 날 뉴욕타임스는 이런 기사를 실었다. 북부군 사령관 조지 B 맥클레런이 ‘7일 전투’에서 패하자 불만에 가득 찬 북부인들은 에드윈 스탠턴 전쟁 장관(국방장관)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했다. 스탠턴 책임론을 맨 처음 들고 나온 사람은 공교롭게도 패장 맥클레런이었다. 그는 스탠턴 때문에 졌다며 보는 사람마다 붙잡고 핑계를 댔다. 스탠턴은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이 정적을 포용해 각료로 임명한 사람이었다. ‘희생양’은 중세의 마녀사냥, 응원하는 팀이 지고 나서 일어나는 관중의 난동,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가족학대로 푸는 행동처럼 온갖 방식으로 만들어진다. 인류가 창조한 가장 끔찍한 희생양은 나치의 유대인 대학살이다. 유대교에서 사용한 희생양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자신들이니 이런 아이러니도 드물다.
구약성서에서 유래한 ‘희생양’(scapegoat)은 유대교 축제인 속죄의 날 의식에 사용되던 두 마리 염소 가운데 한 마리를 가리킨다. 한 마리는 희생물로 바치고 다른 한 마리는 살려주는데, 이 염소를 ‘풀려난 염소’(escapegoat)라 불렀다. 이 염소는 사람들의 모든 불공평과 죄악을 혼자 뒤집어 쓴 채 영적 황무지를 상징하는 황량한 벌판으로 내쫓긴다. 사람들은 이런 방식으로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프랑스 사회인류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희생양 메커니즘’을 가장 차원 높게 정리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희생양 개념은 대부분 ‘인문학계의 다윈’으로 불리는 지라르의 재해석을 토대로 삼는다.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희생양>(민음사)은 성서, 신화, 문학 텍스트에서 ‘희생양’이 폭력과 탐욕으로부터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메커니즘이라고 정의한다. 한 사회는 사회질서의 위기 국면에서 희생양을 만들고, 희생양을 사회의 적으로 만들어 위기를 돌파한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창시자인 지그문트 프로이트나 <황금가지>의 저자이자 민속·인류학자인 제임스 조지 프레이저가 단순히 ‘제의적인 희생양’으로만 파악한 것을 뛰어넘는다. 주목할 점은 신화나 종교 제의, 더 나아가 모든 희생양 메커니즘에 대한 해석이 언제나 지배자나 권력의 시각에서 이루어져 왔다는 사실이다. 희생양의 입장에서 보면 희생 제의는 폭력과 다름없다. ‘희생양’에 내재한 폭력성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기존의 이론과 달리 지라르의 관점은 그래서 현대사상의 흐름에 새로운 획을 긋는다.
희생양으로는 늘 사회적 약자가 선택된다. 만만하거나 순진하며, 유별나거나 위험해 보이는 사람이 표적이 되곤 한다. 지라르가 “희생양은 희생양으로 몰릴 가능성을 항상 지니고 있다”고 했듯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는 권력의 희생양 찾기를 방증하는 표상의 하나다.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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