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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들러리 위원회

1998-02-17 

미국만큼 위원회가 많은 나라도 드물다. 한동안 터무니없이 늘어나 골칫덩이가 될 정도였다. 그러자 위원회를 누구 못지않게 좋아하던 리처드 닉슨 전대통령도 하는 수 없이 크게 손질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어떤 방법으로 위원회 수를 줄일까 고민하던 닉슨은 구체적인 방책을 짜도록 한 참모에게 지시했다. 이 참모가 며칠 뒤 보고해온 방안이란 게 이랬다. 『위원회를 정리하기 위한 위원회를 새로 만드는 게 좋겠습니다』. 위원회를 좋아하는 미국인들의 관행을 빗대 누군가 우스갯소리로 지어낸 것이려니 하겠지만 거짓말같은 사실이다. 위원회라면 일본도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좋아한다. 「위원회 정치」라는 말까지 생겨났으니 그럴 만도 하다.제도나 법안을 만들어보라고 지시하면 미국이나 일본 것을 거의 그대로 베끼는 게 관성이 되다시피했던 한국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정부가 불필요한 위원회를 정비하겠다고 다짐만 하는 게 연례행사였다면 짐작이 가고 남을 게다. 지난해 대선직전의 통계로는 350개에 가까운 정부의 각종 위원회 가운데 2년동안 단 한 번도 회의를 열지 않은 곳이 전체의 4분의 1이나 됐다. 또한 전체의 절반은 1년에 한 번 정도 형식적인 회의를 열고 만 게 고작이었다. 나머지 위원회들이 생산적인 논의를 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정부의 들러리서기에 지나지 않은 경우가 적지 않다. 그 사이에 하고많은 위원회를 구조조정했다는 얘기는 더더욱 들리지 않는다.
 김대중 대통령당선자 체제가 출범하고서는 위원회가 거의 만능에 가깝다시피 됐다 해도 무리는 아닐 성싶다. 물러날 정부의 인사들이 보고해야 할 당선자측 위원회가 너무 많아 한때 일상업무마저 중단되기도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위원회들이 각계 여론을 들어가며 공들여 만들어놓은 안을 국회가 밀실흥정으로 뒤흔들어버려 들러리논란을 부추기고 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의 공동정권이라는 특성 때문에 앞으로 늘어날 위원회가 적지 않을 것이란 예고까지 있고 보면 예삿일은 아닌 것 같다. 우리야말로 위원회를 교통정리할 위원회를 신설해야 하지 않을까 걱정스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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