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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전쟁과 소녀

2003-03-24
전쟁이 참혹과 잔인의 극치라면 소녀는 가냘픔과 순수의 대명사다. 극단(極端)의 대척점에 자리한 전쟁과 소녀가 어우러지면 어김없이 전 인류의 최루탄으로 변한다.주목받는 프랑스 작가 기용 게로의 소설 '어느 전쟁 영웅의 당연한 죽음'도 바로 전쟁과 소녀가 겹쳐 떠오르는 이미지 때문에 폭력성을 돋보이게 하는 수작으로 꼽힌다. 작가는 프랑스 병사에게 집안이 유린당한 베트남 소녀를 만나게 된 주인공이 그녀의 복수를 도와주는 줄거리를 설정해 전쟁의 어두운 그림자를 고발한다.

현실세계에서는 문학이나 예술세계의 감동을 성큼 뛰어넘는다. 1999년 '코소보의 안네 프랑크'로 일컬어졌던 알바니아계 16세 소녀 아도나의 e메일 편지가 대표적인 실례의 하나다. 아도나는 동갑내기인 미국 버클리 고교생 피네간 하밀에게 여러 달 동안 e메일로 코소보전쟁의 참상을 전하다가 나토 군의 유고 공습 이후 어느날 갑자기 소식이 끊겨 버린다. 한참 뒤 그는 전화로 근황을 알려 CNN 방송을 타고 세계적인 유명인사가 된다.

소녀의 눈물이 반드시 양약(良藥)이 되는 것만은 아니다. 쿠웨이트 소녀가 '미숙아 학살' 목격담을 눈물로 호소해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에 대한 무력응징의 정당성을 높이려 했던 미의회 청문회는 부도덕성의 완결판이다. 문제의 소녀가 주미 쿠웨이트대사의 딸인데다 부시의 전직 참모들이 경영하던 홍보회사가 꾸민 것으로 들통나는 바람에 엄청난 역풍을 낳았다.

'이라크 아이들은 어때?'라는 글로 전세계인을 감동시키고 있는 13세 소녀 샬롯 앨더브론의 이야기는 사실이 다소 와전되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여전히 반전운동의 촉매가 되고 있다. 앨더브론은 당초 이라크 소녀로 알려져 왔지만 확인결과 순수 미국인인 것으로 드러났다. 극적인 효과가 반전될 정도는 물론 아니다. 앨더브론의 간절한 호소가 부시 대통령의 차디찬 가슴에도 전해져 이미 터진 전쟁의 참화가 반감(半減)이라도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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