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적(餘滴)

[여적] 빼앗긴 분수대 낭만

1998-03-27

 시인 조병화(趙炳華)는 분수(噴水)를 이렇게 노래한다. 『분수야 쏟아져 나오는 정열을 그대로 뿜어도/소용이 없다/차라리 따스한 입김을 다오/저녁 노을에/무지개 서는/섬세한 네 수줍은 모습을 보여라』. 그가 아니라도 분수는 세계 어느 나라 예술인들에게든 더없이 친근한 소재임에 틀림없다. 우리나라에는 70년대 초반부터 「시가 있는 분수」를 만들어온 「분수동인」까지 생겨났다.실제로 분수대와 광장을 빼놓곤 도시를 생각할 수 없을 게다. 둘은 따로 존재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 바늘과 실의 관계나 다름없다. 분수없는 도시는 영혼없는 인간과 같다고 비유한 사람도 있을 정도다. 서울의 명물 세종문화회관도 그 자체로서는 물론 분수대 광장때문에 직장인과 외국관광객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있다. 90년부터는 해마다 봄·가을이면 어김없이 열리는 점심시간 무료공연이 낭만과 흥을 더해주고 쌓인 스트레스를 덜어주는 쉼터로 자리잡아 왔다.
 유감스럽게도 올 봄에는 이 분수대광장 축제를 볼 수 없게 됐다고 한다. 오페라, 무용, 합창, 교향악, 연극, 고적대, 미8군 악대에다 인간문화재 안숙선씨의 공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프로그램들이 분수의 물보라처럼 흩날려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했다. 지방선거를 앞둔 선거관리위원회의 꽉 막힌 법적용 때문이다. 서울시 산하기관인 세종문화회관이 시민을 대상으로 무료공연을 하면 공무원이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에 해당돼 선거법위반이라는 선관위는 예외를 적용하기 어렵다는 사정만 잔뜩 늘어놓을 뿐 막무가내다. 선관위 외에는 그걸 시빗거리로 삼을 사람이 없을 것 같은데도 말이다.
 한 가지만 생각하는 우리네 관료주의적 단견의 표본을 보는 듯하다. 가뜩이나 올해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체제를 핑계로 민관(民官)을 가릴 것 없이 문화예산부터 깎고 보자는 추세여서 삭막한 풍경이 도를 더해간다. 이곳을 즐겨 찾던 고달픈 직장인은 더 말할 것도 없고 시름을 덜어줄 공간이 하나라도 더 생겨나길 바라는 실직자들은 이 소식을 듣고 어떤 마음일지 궁금하다. 외국인들은 또 이런 한국을 어떻게 볼까 걱정이 앞선다.  
 

'여적(餘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적>골목대장  (0) 2003.03.28
[여적] 전쟁과 소녀  (0) 2003.03.24
[여적] 들러리 위원회  (0) 1998.02.17
[여적] 한국형 FBI  (0) 1998.02.14
[여적] 인사 여론 떠보기  (0) 1998.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