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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주고 욕먹는 훈장

1998-02-07

산악인 안드레아스 헤크마이어는 알프스의 아이거 북벽을 세계 최초로 오른 뒤 나치정권이 주는 훈장 「산악운동의 영웅상」과 축하금 3백마르크를 받고 카 퍼레이드까지 벌였다. 이를 두고 세계 산악계에선 숭고한 산악정신을 나치정권에 팔아넘긴 행위라고 극렬하게 비난했다. 헤크마이어는 그렇다 치더라도 나치정권 또한 훈장을 주고 욕얻어 먹은 대표적인 사례의 하나로 손꼽힌다.우리나라도 8,000m이상 고봉과 7,000m급 거벽을 정복한 산악인에겐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체육훈장을 준다. 1977년 고상돈씨가 한국인으로는 처음 8,848m의 에베레스트를 등정한 뒤부터다. 이 훈장을 탄 사람만 이미 150명에 가깝다. 그러자 훈장을 마구 나눠주듯하는 처사를 마뜩찮아하는 산악인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훈장의 희소성과 값어치가 턱없이 떨어진 탓이다.
 하기야 우리나라만큼 훈장 가짓수가 많고 남발되는 국가도 드물다. 건국이래 지금까지 훈장을 받은 사람은 6·25전쟁 유공자를 포함해 30만명을 훨씬 넘어섰다. 지난 79년 이후는 국민 220명당 1명꼴로 훈·포장을 받았다는 통계가 나와있을 정도다. 따지고 보면 공직자 치고 훈·포장을 최소한 1개이상 받지 않으면 간첩이거나 팔불출이라는 얘기를 듣기 십상인 게 웃지 못할 현실이다.
 직업군인이나 교육자들도 퇴직할 때면 거의 예외없이 훈장을 목에 걸게 된다. 공직자들 가운데는 심지어 세금도둑들까지 「투철한 국가관과 사명감을 가진 우수공무원」으로 뽑혀 훈장이나 표창을 받은 일도 있다. 오죽하면 문민정부들어서는 이효재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공동대표와 소설가 황순원씨처럼 훈장을 거부하는 지식인들이 나오기까지 했을까.
 실상이 이럴진대 지난달 뉴욕 외채협상 타결때 한몫한 미국 고문변호사에게 공로훈장을 주기로 추진하고 있는 우리 재경원 관리들의 발상쯤은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문제는 소식을 전해들은 뉴욕 금융가에서 실소를 흘리고 있다는 데 있다. 이젠 훈장도 요즘 유행어가 된 구조조정이 필요하지 않을까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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