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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역사를 알아야 난세 이긴다

2009.06.05 17:40  

마오쩌둥이 장제스의 국민당을 패퇴시키고 베이징에 입성했을 때 그의 행낭에는 네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고난의 대장정 동안 침대 옆에 놔두고 틈날 때마다 지혜의 샘물을 마신 책들이다. 사마천의 <사기(史記)>,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通鑑)>, 중국어휘사전인 <사해(辭海)>, 어원사전인 <사원(辭源)>이 그것이다. 공산주의자 마오쩌둥에게 카를 마르크스나 블라디미르 레닌의 책이 한 권도 없었다는 것은 의외다. 그는 그 뒤에도 어딜 가든 <사기>와 <자치통감>을 거의 빼놓지 않았다고 한다. 마오쩌둥에게 역사책은 방향을 일러주는 나침반이었고 현재를 해석하는 거울이었다.

중국 근대 문학의 거장 루쉰(魯迅)은 <사기>를 “역사가의 절창이요, 운(韻)이 없는 이소(離騷)”라고 격찬했다. ‘이소’는 초나라 굴원이 쓴 중국 문학 요람기의 걸작시다. 중국 근대의 계몽사상가 량치차오(梁啓超)는 사마천을 “역사학계의 태조대왕이고 역사학의 조물주”라고 숭앙했다.

<사기>를 읽지 않고서는 중국 역사에 대해 얘기하지 말라고 한 까닭을 알 만하다. 이처럼 <사기>는 중국을 읽는 첫 번째 코드다. 웬만한 언어로는 모두 번역되어 읽히는 세계인의 고전이자 동양적 지혜의 정수라는 데 의문의 여지가 없다.

한국인 가운데 사마천과 <사기>에 관해 가장 깊이 천착하고 몰두하고 있는 이는 단연 역사학자 김영수가 아닌가 싶다. 20년 이상 <사기>를 연구해 온 그는 100여 차례 중국을 돌며 사마천의 흔적과 <사기>의 무대를 탐사했다. 최근 10여 년 동안에는 한해도 거르지 않고 사마천의 고향 마을을 찾아갔다. 문서로 된 자료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기 때문이다. 그 이유에 대해 그는 종군기자 로버트 카파가 “당신이 찍은 사진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은 것이다”라고 했던 명언으로 답한다. 그의 정성과 애정이 얼마나 깊었던지 사마천의 고향인 산시(陝西)성 한청(韓城)시에서는 명예촌민이자 홍보대사로 위촉할 정도였다. 비중국인으로는 처음 있는 일이다. 외국인 최초로 사마천학회 정회원이 된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렇게 태어난 책이 <난세에 답하다: 사마천의 인간탐구>(알마)이다. 이 책에는 <사기>를 감흥 깊고 쉽게 풀어 쓴 이야기와 발품을 비싸게 판 현장의 토향이 진하게 풍기는 르포르타주가 함께 버무려져 있다. ‘읽히게 쓴다고 역사를 왜곡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한 미국 역사학자 데이비드 매컬로의 말이 떠오른다. 국내의 사마천 책들이 단순 번역서가 대부분인데다 그것도 <사기열전>에만 편중돼 있는 한계를 훌륭하게 극복해 준다.

‘<삼국지>를 한번도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이야기를 하지 말고 세 번 이상 읽은 사람과는 사귀지 말라’는 속언도 있지만 지은이는 <삼국지>를 백번 읽기보다 <사기>를 한번 읽는 게 낫다고 단언한다. 그는 <사기> 읽는 보람을 열네 가지나 든다. 진한 감동은 물론 진퇴의 지혜, 부조리한 세상에 대한 통렬한 비판, 능력과 재능은 있지만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 세상을 보는 눈을 새로이 틔울 만한 풍자 등이다. 그는 <사기>의 86%가 인물에 관한 얘기여서 ‘최고의 인간학 교과서’라고 권면한다.

저자는 사람을 알고 세상을 논하는 ‘지인논세’(知人論世)라는 한 마디로 <사기>를 요약한다. 인간 군상의 함축판인 <사기>를 읽지 않고 세상과 인간을 안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가장 못난 정치가는 백성과 다투는 자다”란 말이 무겁게 다가온다. ‘화식열전’을 읽지 않고선 <사기>에 대해 논하지 말라는 바로 그 대목에서다. “한번 민심을 잃으면 홍수보다도 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백성의 입을 막기란 물을 막기보다 힘들다”는 구절들도 각다분한 현실과 겹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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