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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정치에도 ‘스프레차투라’가 필요하다

2009.06.19 17:24  

 
데코로, 스프레차투라, 그라지아. 이탈리아 음악가들은 17세기부터 이 세 가지가 어우러져야 감동적이고 장려한 연주가 완성된다고 여겼다. 데코로는 준비와 노력을 의미한다. 이는 연구, 확인, 리허설, 반복 같은 쓸데없어 보이기도 하는 힘든 작업을 통해 준비하는 외로운 과정이다. 스프레차투라는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무척이나 쉬운 것처럼 세련되게 해내는 것을 뜻한다. 스프레차투라는 데코로 없이 불가능하다. 데코로와 스프레차투라가 완벽한 조화를 이루면 자연스레 나타나는 게 우아한 아름다움인 그라지아다.

이 가운데 스프레차투라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인들이 높이 샀던 미덕이자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이탈리아 장인 정신의 뿌리다. 스프레차투라는 원래 ‘거만하게 굴다’ ‘경멸하다’ ‘싼 값을 매기다’란 뜻이었다. 르네상스기를 거치면서 ‘힘든 일을 쉽고도 노련하게 해내는 천재의 방식’을 지칭하는 말로 진화했다. ‘무심한 듯하지만 세심하게, 유유자적하면서도 능란하게’가 스프레차투라의 함축미다.

‘기술이 아닌 듯 보이는 기술’이라는 의미로도 쓰인다. ‘기술을 숨기는 것이 기술’이라는 옛 라틴어 격언이나 ‘기술은 절로 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는 로마 시인 푸블리우스 오비디우스의 말과 맥락을 같이한다. 요절한 천재 미술사학자 고유섭이 ‘무기교의 기교’라는 모순어법으로 한국의 미를 평했던 것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뛰어난 재주를 가진 사람은 그 재주를 자랑하지 않으므로 도리어 서툰 것처럼 보인다고 했던 노자의 ‘대교약졸’(大巧若拙)과도 상통하는 듯하다.

스프레차투라 정신을 처음으로 정리한 사람은 르네상스 시대의 궁정 문인이자 외교관이었던 발다사레 카스틸리오네였다. 그는 1528년에 출간된 <궁정인>에서 귀족들의 예의범절을 상세하게 규정하면서 스프레차투라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궁정 신하는 뭐든지 태연하게 행동하도록 연습함으로써, 예술적 기교를 감추고 말과 행동이 꾸며냈거나 공들여 만든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말아야 한다. 힘들게 일을 행하고 그것에 계속 신경을 쓰는 것은 우아함과 기품이 없어 보이며 그가 어떤 일을 행하든 무시하게 된다.”

21세기에 접어들어 피터 데피로와 메리 데스몬드 핀코위시가 함께 쓴 <스프레차투라>(서해문집)에서는 이탈리아가 배출한 천재들의 이면에 감춰져 있는 각고의 피와 땀을 엿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예술가들은 작품을 창조하는 과정을 철저히 숨겼다. 미켈란젤로는 교황에게조차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보여주지 않았다. 르네상스 예술가들은 후원자에게도 자신의 작업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중간 과정을 공개하면 자연스러운 아름다움과 걸작을 대면하는 순간의 경외감이 훼손되기 때문이다.

시를 쓰거나 오페라를 작곡할 때, 그림을 그리거나 대리석을 매만질 때, 먼 바다를 항해하거나 의학을 연구할 때도 수많은 이탈리아 천재들은 스프레차투라를 생명처럼 여겼다. 엄청난 집중력과 끈질긴 노력의 산물이었음은 물론이다. 이탈리아 문명의 정수(精髓)인 기능성과 아름다움은 바로 스프레차투라에서 나왔다. 지은이들은 이를 ‘미학적 실용주의’라고도 표현한다. 기품 있는 귀부인의 이상적 덕목도 스프레차투라와 우아미(優雅美)였다.

스프레차투라 정신이 정작 요긴한 곳은 권력을 경영하는 정치권이다. 잔머리나 꼼수, 한건주의는 스프레차투라와 거리가 멀다. 기교의 정치는 한 수 위의 유권자들에게 금방 들통 나게 마련이다. 최고의 정치 기술은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이지 않으면서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치공학의 티가 나지 않는 것이다. 여기엔 ‘데코로’에 바탕을 둔 수준 높은 내공이 필수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 노벨문학상 수상 시인 T. S. 엘리어트는 교활, 표리부동, 비도덕적 책략, 무자비의 상징처럼 알려진 마키아벨리가 실제로는 가장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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