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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신분상승 욕망의 덧없음

2009.07.03 17:37  

서민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는 아버지의 땅을 물려받아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그림을 그렸다. 빈한했던 밀레가 절친한 친구인 화가 테오도르 루소의 지혜로운 도움을 받았던 우정의 일화는 눈물겹다. 밀레는 귀족중심의 장식적이고 기념비적인 초상이 주류였던 종전의 화풍에서 벗어나 서민 계층의 농부를 주로 그려 ‘농부화가’란 별명도 얻었다. ‘우유 짜는 여인’ ‘씨뿌리는 사람’ ‘저녁기도’ ‘이삭줍기’ ‘만종’ 등이 모두 그렇다. 이 같은 화풍은 그가 사회주의자라는 비난까지 감수했을 만큼 당시로선 충격적이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서민화가’ 박수근은 양구공립보통학교에 다니던 12살 때 ‘만종’을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아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박수근은 평생 동안 이름 없고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소재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묘사하고자 했다. ‘빨래터’ ‘맷돌질하는 여인’ ‘나물 캐는 여인들’ ‘아기 업은 소녀’ ‘기름장수’ ‘농부들’을 보면 한결같다. 부자들이 그의 서민 그림을 사지 못해 안달하고 있는 것을 보면 한편으론 역설적이기까지 하다. 지난해 역대 최고가인 45억2000만원에 낙찰된 ‘빨래터’의 진위 논란이 수그러들지 않고 소송까지 진행 중인 가운데 지난 10년간 한국 미술품 경매 낙찰총액 1위가 박수근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다.

‘부자들을 위한 정부’라는 달갑잖은 딱지를 떼기 위해 새삼스레 ‘서민’을 ‘큰 그림’으로 그리고 있는 이명박 정부의 정책을 보며 떠오른 게 밀레와 박수근이다. 박희태 한나라당 대표는 ‘서민을 부자로 만드는 당’이라고 한술 더 뜬다. 그는 “사람들이 한나라당을 ‘부자당’이라고 하지만 정확히 풀 네임으로 말하면 ‘부자를 만드는 당’ ‘서민을 부자로 만드는 당’이다”라고 친절하게 설명한다.

그의 말을 들으면 프랑스 극작가 몰리에르의 <서민귀족>(동문선)과 연암 박지원의 <양반전>(창비)이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두 작품 모두 신분상승을 위한 인간의 욕망을 사실적으로 풍자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흡사하다. 비슷한 시기에 서로 다른 나라, 그것도 다른 역사와 문화를 가진 서양과 동양이라는 공간적 차이를 뛰어넘어 유사점이 발견되는 게 특이하다. <서민귀족>의 주인공 ‘주르댕’과 박지원이 쓴 <양반전>의 주인공 ‘정선부자’는 닮은꼴 욕망을 가진 인물이다. 주인공이 모두 물질적인 부귀를 얻었지만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돈으로 귀족과 양반의 지위를 얻고자 갖은 애를 쓰는 것에서 공통점이 발견된다. ‘주르댕’은 상인가문에서 태어나 부유하지만 평민이다. 그는 재산에 어울리는 귀족 지위를 갖고 싶은 욕구가 있는 인물로, 귀족들이 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흉내내려 한다. ‘정선부자’ 역시 강원도 정선고을에서 가장 부유하지만 평민이다. 그는 마을 양반을 대신해 빚을 갚아주고 양반 계급을 얻기 위해 몸부림친다.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계급의 허상을 고발하고 조롱한다. 몰리에르는 ‘주르댕’을 희극적인 인물로 설정해 그의 신분상승 욕구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것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박지원은 한층 직설적이다. 양반을 돈으로 산 ‘정선부자’는 쓸데없는 격식들과 강도와 같은 특권에 질려 이후로는 양반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는 게 작품의 결말이다.

2007년 대선에서 서민들의 다수가 이명박 후보를 찍었던 것은 ‘주르댕’ 같은 신분상승 정도는 아니더라도 살림살이 개선을 조금이나마 충족시켜 주리라는 ‘경제 대통령’에 대한 기대 때문이었다. 이명박 대통령은 “지금까지 서민 정책에 가장 큰 신경을 써왔다”며 이 정부 들어와서 추진한 감세의 약 70% 가까운 혜택은 서민과 중소기업에 돌아가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럼에도 왜 ‘부자에게는 세금을 깎아주고 서민의 월급은 깎고’ 같은 풍자와 해학이 끊이지 않는지 하늘나라의 몰리에르에게라도 물어봐야 할까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