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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정치산물 헌법, 개혁을 논하라

2009.07.17 17:36 Keyword Link | x

헌법은 별나게 재즈, 야구와 더불어 미국의 3대 발명품으로 꼽히기도 한다. 미국은 1776년의 독립선언문을 바탕으로 1787년 인류 역사상 최초로 성문헌법을 만들었다. 미국 헌법은 시대 흐름에 맞춰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지만 200여년 동안 단 한 번도 헌정 중단 사태 같은 큰 굴곡 없이 작동하고 있다.

미국 독립의 기초를 닦은 정치사상가이자 작가인 토머스 페인은 헌법을 “자유의 문법이며 정치의 성서”라고 숭앙한다. 19세기의 한 미국인은 “헌법은 미쳤을 때 자살적 행동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맑은 정신이었을 때 스스로를 묶어 놓는 사슬”이라고 흥미롭게 비유했다. 사회철학자이자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표현도 유사하지만 가슴에 다가든다. “헌법은 사람이 술에 취했을 때 자신을 제어할 수 있도록 맑은 정신일 때 대비할 수 있다는 사상을 반영한다.”

헌법이 나라의 역사가 투영된 최고 기본법이자 ‘현대사회의 경전’이라고 불리는 것도 그래선 듯하다. 어느 헌법에든 인류가 이룩한 가치가 녹아들어 있다. 대한민국 헌법도 이런 세계 헌법사 속에서 파란곡절을 겪으며 유영(遊泳)해 왔다. 우리 헌법은 이제 다시 새로운 수영복으로 갈아입을 가능성이 엿보인다. 제헌절 61돌과 때맞춰 헌법개정 논의의 물꼬가 터졌기 때문이다. 국회의장이 제헌절 기념사에서 개헌특위 구성을 공식적으로 제의한 데다 대부분의 정파와 국민들이 개헌 자체에는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현행 헌법이 1987년 민주화 투쟁의 산물이지만 적지 않은 문제점을 지녔음을 누구나 동의한다. 지금의 헌법은 짜여진 민주화 정치일정에 따라 촉박하게 개정되는 과정에서 시대정신을 깊이 반영하지 못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투쟁을 이끌었던 시민사회가 배제된 채 권위주의를 상징하는 구체제의 정파 대표들만이 헌법 개정의 주체가 됐기 때문이다. 현행 헌법이 권력구조 측면에서는 물론 국민 주권 등 다양한 차원에서 태생적 한계를 지닌 것도 그런 탓이다.

시민운동단체 ‘함께하는 시민행동’이 엮은 <헌법 다시보기>(창비)는 현행 헌법이 어느 정도 시민과 동떨어진 정치적 산물인 것인지를 분야별로 세밀하게 짚어냈다. ‘87년 헌법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부제가 잘 말해준다. 이 책은 헌법을 지금까지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향에서 바라본다. 협애한 정치적 개헌이 아닌 공동체 발전 지향점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참된 개헌에 대한 시민사회의 진지한 고민이 엿보인다. 헌법 개정 논의를 시민의 시각에서 바라보자는 취지 아래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헌법 다시보기 기획위원회’를 조직해 여러 차례의 진중한 토론을 거쳐 이 책을 엮었다. 박명림을 비롯한 법학자·정치학자·철학자·사회학자·여성학자·평화운동가·환경운동가·시민운동가 등 15명이 필진으로 참여했다.

지구화, 정보화, 생태화,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배려 등 21세기적 과제를 반영하는 새로운 헌법 담론을 모아 단순한 ‘개정’이 아닌 ‘개혁’을 주창한다. 헌법을 시민의회, 경제적 다원화, 평화주의, 생명과 환경, 문화, 여성, 인권, 자치와 분권의 눈으로 보고 대안을 제시한다. ‘공급자 중심의 헌법개정 논의’가 아닌 ‘수요자 중심의 헌법개혁 논의’로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자세가 오달지다.

이번 개헌논의가 추동력을 얻는다면 국가 대개조 작업이나 다름없어야 한다. 개헌 논의의 주체가 시민사회로 확장되는 것은 물론 논점도 권력구조 문제를 넘어 시대정신이 담긴 헌정 체제 전반으로 지평이 확장돼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위로부터가 아닌, 아래로부터의 헌법 개혁 의지가 반드시 성취돼야 하는 까닭을 이 책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이 꿈을 꾸면 한낱 꿈이지만 모두가 함께 꾸면 그것은 현실이 된다”는 화가 프라덴슈라이히 훈데르트바서의 살갑고 금쪽 같은 말이 이 때 제격이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