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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재에서

단순하게, 소박하게, 느리게… 그 텅빈 충만

2009.07.31 17:44  

‘생태 위기의 원죄는 <성경>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통하는 <성경>에 죄를 뒤집어씌우다니 큰일 날 얘기가 아닌가. 서양의 생태근본주의자들은 <구약성서> 창세기 1장 28절의 인간중심적 세계관이 오늘날의 환경파괴와 생태계 위기를 낳았다고 서슴없이 비판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이 구절은 기독교적 가치관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서양에서 자연정복의 성서적 정당성을 제공했다는 것이다. 미국 역사학자·인류학자인 린 화이트와 생태조경가 이안 맥하그는 현대의 생태 위기가 하나님으로부터 정복자나 지배자의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여기는 인간들의 잘못에서 비롯됐다고 꼬집는다.

이 같은 성찰을 반영하듯 생태형 귀농이 부쩍 주목을 받고 있다. 번잡하고 각다분한 도시를 떠나 자연과 더불어 평온하게 살기를 꿈꾸는 이들이 늘어나서다. 생태형 농업은 적게 벌어, 덜 쓰면서, 더 느리게, 흙을 밟고 사는 소박한 삶을 추구한다. 하지만 귀농이 어디 말만큼 쉬운가. 돈벌이가 되지 않는 것은 물론 손에 익지 않은 농사일, 자녀 교육 등을 생각하면 엄두를 내기 쉽지 않은 게 시골살이다.

그렇다면 도시에서는 생태적으로 살 수 없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도시와 생태를 여전히 기름과 물의 관계로 인식한다. 여성 환경생태운동가 박경화는 농촌으로 떠나지 않고도 생태적으로 살 수 있는 작은 지혜들을 듬뿍 전수해 준다. 그가 체득한 현장경험을 토대로 쓴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사는 법>(명진출판)은 자연주의를 실천하는 삶이 그리 별난 것이 아니라고 일러준다. 도시에서 생태적으로 사는 게 돈이 많이 들고, 한계도 많다는 생각은 오해라고 그는 말한다. 도시를 떠나지 않아도 콘크리트 숲에서 초록바람을 느끼며 사는 ‘생태적 도시인’이 되면 ‘텅 빈 충만’을 옹글게 즐길 수 있다는 것이다. 친생태적 생활방식들은 누구나 다 아는 것일 수도 있기에 실천이 관건이다. 베란다에 공기정화식물 가꾸기, 공기정화기보다 자연환기를 우선하기, 숯 활용법, 자연 화장법, 입맛에 따른 채식 즐기기, 물 재활용법, 생태적 침실꾸미기처럼 손쉬운 것부터 생태적 머리 감기 같은 비교적 고난도 방법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하다. 나를 돌아보는 산행법 같은 바깥생활도 곰살갑게 전해줘 금상첨화다.

‘생태적 도시인이 되는 10가지 자기와의 약속’은 각자의 몫이다. 될 수 있는 한 단순하게, 소박하게 산다. 느리게 사는 습관을 들인다. 깨끗한 것보다는 건강을, 건강보다는 자연스러움을 먼저 생각한다.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주는 법을 생각한다. 새 것보다는 오래 쓰는 즐거움을 누린다. 작은 것을 볼 때도 우리 아이의 미래까지 생각한다. 내가 머물렀던 자리에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나를 둘러싼 전체를 생각하는 눈을 갖는다. 사람도 자연 생태계 속 하나의 종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자연을 대한다. 자신이 믿는 대로 실천한다.

요즘 들어 ‘녹색 성장’ ‘그린 혁명’ ‘친생태적·친환경적 개발’ 같은 구호가 춤을 춘다. 냉소적 반응이 돌아오곤 하는 것은 풀과 곤충, 새나 짐승의 생명을 존중하지 않으면서 ‘생태’라는 낱말을 남발하기 때문이다. 1869년 생태학이란 용어를 최초로 사용한 독일 생물학자 에른스트 헤켈은 동물이든 식물이든 생태계를 개체와 전체가 유기적으로 연결된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

문득 80세 때부터 관음원에 주석하면서 의자를 새로 장만하는 것조차 마다했다는 조주 선사가 떠오른다. 관음원이 너무 낡아 빗물이 새어들었다는 얘기는 그렇다치더라도 다리가 부러진 의자를 생나무 대신 부지깽이로 묶어 재활용했다는 일화는 120살까지 이어진 그의 ‘생태적 삶’을 명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