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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과학자의 망명

2003-04-22
"자신의 조국이 달콤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아직 어린아이와 같다. 타국이 다 조국처럼 느껴지는 사람은 이미 성숙한 사람이다. 세계가 다 타국처럼 느껴지는 사람이야말로 완성된 인간이다"'오리엔탈리즘'의 저자 에드워드 사이드 미국 컬럼비아대 교수는 망명 생활 속에서 예술과 학문이 꽃피는 까닭을 이런 명언으로 묘파한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망명자이기도 한 그가 변경인(邊境人)으로서 뼈저리게 체화한 담론을 함축하고 있는 듯하다.

과학의 최고 경지 가운데서 탄생한 핵무기도 공교롭게 망명자와 이들을 둘러싼 경쟁이 직결돼 있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원자폭탄을 개발하라고 건의한 앨버트 아인슈타인은 독일에서 망명한 유대인이며, 최초의 핵무기 개발계획인 '맨해튼 프로젝트'에 참여한 과학자들 가운데도 망명자들이 적지 않다.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해 양자역학의 기틀을 마련한 독일 태생의 베르너 하이젠베르크가 노벨상을 받은 뒤 1939년 미국을 방문하자 역시 노벨상 수상자인 엔리코 페르미는 그에게 망명을 제의한다. 하지만 그는 이를 뿌리치고 독일로 돌아가 나치 정권의 핵무기 개발을 주도하게 된다. 하지만 미국과 핵무기개발경쟁을 벌이던 나치는 원자폭탄을 만들지 못한 채 끝내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지고 만다. 히틀러가 핵개발에 실패한 원인 가운데 하나가 하이젠베르크를 비롯한 양심적인 과학자들의 태업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년여 전 그 양심이 거짓이었다는 이설(異說)이 나오기도 했지만.

최근 북한의 핵개발을 주도하던 과학자들의 망명설이 북핵 3자협상과 때를 같이해 나돌고 있어 눈길을 끈다. 진실이 시원하게 밝혀지지 않은데다 미국 정보기관의 기획망명이라는 설도 있어 흔쾌하진 않지만 이래저래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포기하게 된다면 다행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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