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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여왕 50년

2003-06-04
한 영국 교민이 이런 감회를 토로한 적이 있다. "내가 영국에 오랫동안 살면서 한국인임이 가장 자랑스러웠던 일은 몇 년 전 삼성전자가 현지 공장기공식을 할 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테이프커팅을 하는 장면이었다". 한 때는 '해가 지지 않는 나라'였던 영국의 여왕이 한국 기업의 공장 기공식에 참석할 정도로 우리 국력이 커졌다는 자긍심의 발로(發露)이다. 달리 보면 더없이 치열한 경제전쟁시대를 상징하는 일이자 영국도 어쩔 수 없이 해가 지는 걸 보며 사는 나라가 됐다는 방증인 셈이다.엘리자베스 2세는 대영제국의 영화(榮華)를 구가하던 엘리자베스 1세 때와 견주면 사뭇 대조적이다. 45년에 걸친 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는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무찌르는 기개가 넘쳐났고, 인도와도 바꾸지 않겠다던 윌리엄 셰익스피어를 탄생시킨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의 삶도 "나는 대영제국과 결혼했다"며 독신으로 일관한 격동의 세월이었다.

이와는 달리 엘리자베스 2세는 고고한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리없이 왕실의 권위를 지켜내려 애써 왔다. 1952년 2월6일 아버지 조지 6세 왕이 서거하자 맏딸로서 왕위를 계승한 뒤 이듬해 6월2일 정식으로 대관식을 가진 이래 엊그제 대관 50년을 맞았다. 선대의 왕들이 세력을 뻗쳐 나갔다면 그의 치세는 홍콩을 반환하는 등 제국주의 시대를 청산하는 반세기였다.

1년에 두 나라씩만 방문하는 관행을 지키며 '군림은 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 제왕'으로 굴곡없이 국민의 존경을 받아온 엘리자베스 2세는 자녀들 때문에 더 많은 속을 썩였던 편이다. 큰 아들 찰스 왕세자가 1996년 다이애나와 이혼을 발표한 뒤 두 달이 채 되기도 전에 둘째 앤드루 왕자가 형의 전철을 밟았다. 딸 앤 공주 역시 이혼으로 왕실을 시끄럽게 만들었다. 셋째 아들은 포클랜드(말비나스) 전쟁 때 전사한 아픔을 겪었다.

영국국가 제목처럼 국민이 '여왕폐하만세'(God Save the Queen)를 부르는 한편에서는 어머니의 장기집권으로 왕세자의 마음 고생이 이만저만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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