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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수상 거부

2003-06-11
독설가로 명성이 자자했던 프랑스 화가 에드가 드가에겐 이런 일화가 따라다닌다. 한 동료 화가가 제자의 '활쏘는 사냥꾼'이라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참 잘 겨누고 있지요"라고 말하자 드가는 "상(賞)을 겨누고 있군 그래"라며 쏘아붙였다. 상 욕심으로 가득 찬 예술가들의 심보를 비꼰 것이다.하지만 영예롭기 그지없는 상조차 서슴없이 물리치는 이들이 심심찮게 심금을 울린다. 재미 화교 여학생이 전국 최우수 고교생에게 주는 대통령상을 거부한 사건이 중국에서 화제를 불러 일으킨 적이 있다. 미국 최고 명문의 하나인 필립고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게 된 왕위안(王淵)은 빌 클린턴 대통령이 수여하는 상을 거부한 것이다. 미국 국적자만 받는 상이어서 미국 국적을 취득할 계획이 있다고 백악관에 통보하면 그만이었다. 그렇지만 왕은 "어떤 영광도 조국보다 우선하지 못한다"는 명언을 남기며 수상거부를 선언했다.

명우(名優) 말론 브란도는 색다른 이유로 아카데미상 수상을 거절했다. '대부 2'에 출연해 남우주연상 수상자로 선정됐지만 "할리우드가 인디언들을 차별한다"는 게 이유였다.

이따금 상의 권위에 대한 불만이나 자존심 때문에 수상을 거절하는 경우도 더러 나온다. 2000년 미국 비정부기구(NGO)가 주는 국제평화상을 물리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이유를 밝히지 않았지만 이 상의 공동수상자이기도 한 김대중 대통령에게만 노벨평화상이 돌아갔던 사실과 연관하는 분석이 그럴듯하게 나돌았다. 생전에 은관문화훈장을 거부했다가 사후 금관문화훈장을 추서받은 소설가 황순원의 사례도 유사한 경우다.

세계적인 신동 피아니스트 임동혁(18)이 최근 세계 최고 권위의 퀸 엘리자베스 국제콩쿠르에서 3위에 입상했으나 수상을 거부한 것도 심사결과 불만 때문이라고 한다. 심사위원에 1, 2위 입상자의 스승이 포함돼 있었다는 것은 석연치 않은 대목이긴 하다. 이미 정상급에 올라 콩쿠르에 연연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지적도 없지 않지만 명예와 적지 않은 상금을 거절한 용기와 고집도 범상한 일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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