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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평양 구경

2003-09-17
"뭇 물줄기 모였으니 강 이름이 대동이라, 해맑고 굼실굼실, 번쩍여 출렁출렁, 깨끗하긴 흰 비단을 깐 듯, 해맑기는 청동 거울 같은데, 양편 언덕 수양버들은 온종일 춤을 추며, 질펀한 모래벌판, 넓은 들에 날아 우는 기러기들, 푸른 매가 성(城)을 둘러 사면이 드높은 데, 굽어보면 가랑비에 누역을 쓴 어옹(漁翁)들, 멀리 들으면 석양녘에 피리 부는 목동들, 그림으로도 그릴 수 없고 노래로도 다할 수 없네"'보한집'으로 문명(文名)을 드날린 고려 무신정권시대의 개혁적 지식인 최자(崔滋)는 당시 서경이었던 평양을 필설로 다 묘파하기 어렵다며 이처럼 안타까워했다.

고려때 문인 조위(趙瑋)가 읊은 '평양 8경'은 시정(詩情)이 듬뿍듬뿍 묻어난다. 을밀대의 봄경치(密臺賞春), 부벽루와 대동강물에 비낀 달밤 풍경(浮碧玩月), 해질녘 영명사에 스님들이 찾아드는 모습(永明尋僧), 보통강 나루터에서 길을 떠나는 나그네와 배웅하는 주인장(普通送客), 거피문 앞 대동강의 뱃놀이(車門泛舟), 애련당에 내리는 빗소리(蓮塘聽雨), 늦가을에도 푸름을 잃지 않는 반룡산의 사철나무(盤龍晩翠), 봄비에 불어난 대동강물의 소용돌이(馬灘春漲).

민족주의 사학자 호암(湖岩) 문일평(文一平)은 '영주만필'(永晝漫筆)에서 "도시의 산수미로는 한양.개성.평양이 제각기 특색을 가졌으나 명미염려(明媚艶麗)한 것으론 그래도 평양을 먼저 꼽을 수밖에 없다"고 했을 정도다.

수많은 시인 묵객이 상찬했듯이 평양은 '형승(形勝)'을 빼놓곤 논할 수 없다. '평양 형승'은 옛 선조들이 완상해마지 않았다는 만경대, 을밀대, 능라도, 청류벽, 추남터를 비롯한 9곳을 이른다.

평양도 이제 달라진 인걸과 세월의 무게에 어쩔 수 없이 윤색된 풍광이 적지 않지만 명승의 아취만은 여전하다고 전해진다. 그런 평양이 엊그제 남쪽의 일반 관광객에게도 처음으로 문이 열린 의미는 결코 가볍지 않다. 반백년이 넘은 체제의 이질감이 작지는 않겠으나 오가는 발길이 잦아지면 하나가 될 날도 앞당겨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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