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적(餘滴)

[여적] 삼각산

2005-10-10
태조 이성계는 조선 건국의 창대한 포부를 삼각산과 한강에 비유해 시 한 수로 읊는다. "우뚝 솟은 높은 뫼는 하늘까지 닿았네/한양의 지세는 하늘을 열어 이룩한 땅/굳건한 큰 대륙은 삼각산을 떠받쳤고/넓은 바다 긴긴 강물은 오대산에서 흐르네." 조선을 억조창생과 더불어 만년세세 이어가겠다는 웅혼한 마음을 이 시에 담았던 것이다. 그에 앞서 풍수지리에 달통한 조선 개국 공신 정도전은 삼각산에 올라가 남녘을 바라보면서 이곳 한양을 새 도읍지로 정해 가슴깊이 새겨 두고 있었다. 오늘날에도 망경대(望京臺)로 불리는 봉우리 이름은 정도전이 도읍지를 바라보았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다.

일제 때부터 북한산으로 이름이 바뀐 삼각산은 백제 건국과도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는 기록이 발견된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중 시조인 온조(溫祚)왕 기사가 그것이다. 당시엔 부아악(負兒岳)으로 불린 이곳에 온조는 도읍지를 찾기 위해 올랐다고 한다. 아이를 업은 어머니 형상 같아서 부아악이란 이름이 붙었다는 설도 전해진다.

고려 시대부터 이미 삼각산이란 이름으로 불렸다는 기록들도 나온다. 고려사 서희전(徐熙傳)에는 서희가 "삼각산 이북도 고구려의 옛 땅입니다"라고 성종에게 아▦다는 대목이 보인다.

인수봉(仁壽峯).백운봉(白雲峯).만경봉(萬景峯)의 세 봉우리가 우뚝 서서 세 뿔과 같다해서 이름을 얻은 삼각산은 1915년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위원을 지낸 이마니시 류(今西龍)란 사람이 보고서를 낸 이후 북한산으로 바뀌어 일반화되었다는 게 정설이다. 그는 이 산의 유적을 조사한 뒤 제출한 보고서의 이름을 '고양군 북한산 유적 보고서'라고 지었다. 일제는 삼각산의 민족정기를 빼앗기 위해 이름을 바꾸는 것으로 모자라선지 철심을 박고 독립군의 거점을 없애기 위해 사찰까지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한도 많고 사연도 남다른 북한산이 '우리 산이름 바로찾기'운동을 통해 삼각산이란 제이름을 찾게 됐다니 만시지탄(晩時之歎)일 뿐이다.

'여적(餘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적] 두바이油  (0) 2006.07.16
[여적] 앨버트로스  (0) 2006.06.06
[여적] 로봇 과외  (0) 2005.10.04
[여적] 평양 구경  (0) 2003.09.17
[여적] 옷의 기원  (0) 2003.08.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