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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기회의 언어’

입력 : 2006-08-27 18:20:30

1848년 ‘아테네움’이란 영국 잡지에 이런 글이 실렸다. “영어는 문법 구조가 쉽고 변형이 거의 없다. 자연에 나타나는 성(性) 외에는 성의 구분도 별로 없다. 어미와 보조동사가 간단명료하면서도 장엄함이나 표현의 강도, 풍부함에서 어떤 언어에도 결코 뒤지지 않는 우리 모국어는 구조상 세계어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

저명한 현대 영어학자 데이비드 크리스털은 이런 주장을 한마디로 일축한다. “애초부터 핵심을 잘못 짚었다.” 크리스털은 미적 가치, 효과적 표현력, 문학적인 힘, 종교적 의미 같은 거창한 것을 국제어의 본보기로 내세우는 다수의 단견을 꼬집는다. 영어에 관한 책만 60여 권을 쓴 그의 탁견(卓見)을 들어보면 고개가 끄덕여질 수밖에 없다.

역사상 특정 언어가 국제어가 된 것은 한가지 이유 때문이다. 그 나라의 정치적인 힘, 그 가운데서도 군사력이다. 2000여년 전 그리스어가 중동지역에서 국제언어가 된 것은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지성 덕분이 아니었다. 오로지 알렉산더 대왕이 휘두른 창 때문이라는 게 정답이다. 라틴어가 유럽 전역으로 퍼져 나간 것도 로마제국 군단이 올린 부수입이다.

현대로 넘어오면 국제어나 세계어가 군사력의 부산물만은 아니다. 군사적인 힘이 언어를 처음 들여가긴 하지만 이를 유지하고 확장하는 것은 경제적인 힘이 결정적이다. 19세기 영국 제국주의가 영어를 ‘해가 지지 않는 언어’로 만들어놨지만 20세기 이후 위상을 높인 것은 순전히 미국의 경제력이다. 미국 달러가 영어를 업고 다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최근 중국어가 급속하게 제2의 세계어로 부상하고 있는 것 역시 경제발전에 따른 국력신장이 바탕이다. 외국어 배우기에 가장 소홀하다는 미국인들 사이에서 중국어 붐이 일기 시작한 것을 보면 예사롭지 않다. 조지 부시 대통령까지 나서 중국어 배우기를 독려하고 있을 만큼 ‘기회의 언어’로 중국어가 본격적으로 뜨고 있는 것이다. 소수 언어의 멸종 속도가 빨라지고 있다는 우려 속에 제 나라말을 지키고 확산하는 열쇠도 결국 국력임을 새삼 깨닫는다.

〈김학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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