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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첫 인상의 허실

입력 : 2006-09-10 18:06:17

리처드 닉슨 전 미국 대통령은 젊은 시절 연방수사국(FBI) 직원 채용시험 때 낙방의 쓴 잔을 들어야 했다. 최종 면접 시험관은 29살때 국장이 된 뒤 무려 48년간 닉슨을 포함해 8명의 대통령을 보좌한 신화를 남긴 에드거 후버였다. 낙방 이유는 첫인상이 음울해 보인다는 것이었다. 닉슨이 그때 합격했더라면 훗날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개연성이 높지만 시험에 떨어져 기분 좋을 리 없었다.

세상을 유혹한 세기의 스타 마릴린 먼로에게서도 흡사한 예화가 전해진다. 먼로는 18살 때 사진모델을 지망했다. 하지만 당시 캐스팅 전문가들은 먼로의 첫인상에 한결같이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한 모델 에이전시는 “당신은 실무를 배워 비서가 되거나 아니면 결혼하는 편이 낫겠다”고 쏘아붙이듯 냉대했다.

실제로 우연한 실험에서 첫인상과 능력에 상관관계가 별로 없다는 결과가 나왔다(슈테판 클라인의 책 ‘우연의 법칙’). 1970년 미국 텍사스 휴스턴 대학에서 뜻하지 않은 실험을 하게 됐다. 휴스턴 대학 의대는 필기시험 합격자 가운데서 면접을 거쳐 최종 합격자를 선발했다. 면접관들은 학업을 잘 감당하고 좋은 의사가 될 것으로 보이는 인상좋은 학생들을 뽑았다고 자부했다. 공교롭게도 그해 행정착오가 생기는 바람에 의과대학에 더 많은 인원이 배정됐다. 대학측은 면접에서 떨어뜨렸던 지원자들을 합격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측은 처음 합격한 학생들과 추가 합격시킨 학생들을 비교 관찰해 보기로 했다. 처음 합격한 학생들과 면접에서 떨어졌던 학생들의 성적은 첫 기말고사부터 전혀 차이가 없었다. 의사가 된 뒤에도 능력의 차이는 찾아볼 수 없었다.

‘첫인상’에 관한 담론이 취업의 계절을 맞아 마치 이데올로기처럼 행세한다. ‘첫인상이 평생을 좌우한다’ ‘첫인상 3분 만에 결정된다’ ‘첫인상 5초의 법칙’ ‘첫인상 0.1초면 끝’ ‘첫인상 10계명’. 손꼽자면 한이 없을 정도다.

전혀 틀린 말은 아니지만 ‘대조효과’에 따른 두 번째 이후 인상이 더 중요할 때가 많다는 점도 간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첫인상에 또 속았네’란 경구(警句)도 있지 않은가.

〈김학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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