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적(餘滴)

[여적] 비목

입력 : 2006-09-24 18:06:06

국민가곡 ‘비목’(碑木)은 제목부터 잔뜩 애잔하다. ‘초연이 쓸고 간 깊은 계곡 깊은 계곡 양지녘에’로 시작하는 가사는 시종일관 처연하다. 4분의 4박자인 느린 템포로 이어지는 곡조는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비목’이 ‘가고파’ ‘그리운 금강산’과 더불어 3대 애창곡으로 불리는 까닭도 이처럼 애닯은 정감이 한국인들의 한(恨)과 접목돼 있기 때문이리라.

‘비목’의 탄생은 지금부터 4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63년 어느 날, 동족상잔의 전쟁 상흔이 남아 있는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 기슭에서 수색중대 소대장인 육군 소위가 사병들과 함께 순찰을 돌고 있었다. 그는 우연히 이끼 낀 돌무덤을 발견한다. 무덤 쪽으로 발길을 옮기던 소대장은 놀라 멈칫했다. 보통 무덤처럼 생긴 그 곳엔 전쟁의 아린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녹슨 철모, 카빈 소총 한 자루, 묘비처럼 꽂혀 있던 썩은 나뭇등걸, 고즈넉이 피어있는 산목련. 싸우다 숨진 한 군인의 초라한 무덤이라는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소대장은 즉석에서 시 한편을 지어 땅 속에 누워있는 묘 주인의 넋을 달랬다. 그 소대장은 이제 고희를 바라보는 음악평론가 한명희다. 이렇게 만들어진 헌시(獻詩)는 훗날 작곡가 장일남을 만나면서 ‘비목’이란 이름의 가곡으로 탄생, 국민적 사랑을 받기에 이른다. 동양방송(TBC) 프로듀서로 일하던 한명희는 방송일로 자주 만난 장일남으로부터 신작가곡 가사를 부탁받고 이 시를 건네준 것이다.

‘비목’에 얽힌 일화는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한명희는 1987년 월간 ‘신동아’ 6월호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무덤의 주인공은 영락없이 나같은 20대 한창 나이의 초급장교로 산화한 것이다. 일체가 뜬 구름이요, 일체가 무상이다. 처음 비목을 발표할 때는 가사의 생경성과 그 사춘기적 무드의 치기가 부끄러워서 ‘한일무’라는 가명을 썼다. 여기 일무(一無)라는 이름은 바로 이때 응결된 심상이었다.”

한명희와 함께 국민가곡 ‘비목’을 탄생시킨 장일남 선생이 오랜 투병 끝에 어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언제나 우리 마음 속의 ‘비목’이 되어 처녀작 ‘기다리는 마음’처럼 모두를 기다리게 할 게 틀림없다.

〈김학순 논설실장〉


'여적(餘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적] 모정(母情)  (0) 2006.10.08
[여적] 가을의 전설  (0) 2006.10.03
[여적] 첫 인상의 허실  (0) 2006.09.10
[여적] ‘기회의 언어’  (0) 2006.08.27
[여적] 10원짜리 동전  (0) 2006.08.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