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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가을의 전설

입력 : 2006-10-03 17:47:35

가을이 되면 생각나는 영화는 단연 ‘가을의 전설’이 아닐까. 수채화 같은 대자연의 풍광과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 여기에 애잔하게 흐르는 음악. 가히 미국 몬타나 평원을 적셔 놓는 사랑의 대서사시다. 스토리보다 배경과 음악에 더 높은 점수를 매기는 것은 아카데미상 촬영상을 받은 것만 봐도 알 만하다. 10년도 더 전에 나왔지만 오랫동안 사랑을 받는 까닭도 아련한 영상미에 있는 듯하다.

여성 팬들에겐 남자가 저렇게 멋질 수 있구나 하는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영화이기도 하다. 브래드 피트를 일약 스타덤에 올린 작품으로 손색이 없는 것도 그 때문이리라. 그런 만큼 비판적인 눈으로 보는 여성들은 은근히 남성우월주의를 부추긴다고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주인공 트리스탄(브래드 피트)은 가을을 닮은 남자다. 그가 태어난 것도 가을이다. 가을에 만난 덩치 큰 곰과 싸우다 끝내 전설 속으로 사라지는 마지막 설정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언제까지나 기다릴게요. 그것이 운명이라 해도 운명을 넘어서 영원히.” 연인들이 인용하고 싶은 명대사가 추억과 감동을 더해 준 것 같다.

영화가 아니라도 하늘의 별자리 페가수스가 나타나면 ‘가을의 전설’이 무르익기 시작한다는 신호다. 천마 페가수스가 태우고 달리는 것은 안드로메다 공주뿐 아니라 한 아름도 넘는 가을 하늘의 이야기 보따리다.

‘가을의 전설’ 하면 야구밖에 생각이 나지 않는다는 이들도 적지 않다. 언젠가부터 우리나라 프로야구의 포스트 시즌을 일컫는 말이 됐기 때문이다. ‘가을의 전설’은 야구 팬들을 설레게 하는 미국 프로야구 월드시리즈의 상징어다.

그런 ‘가을의 전설’이 몇 년 사이에 아무데서나 남발되곤 한다. 전설의 신비감을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가을의 전설’은 이제 컴퓨터 게임에서도 등장하고, 증권시장에서도 뜬다. 그런가 하면 유명 콘서트에도 ‘가을의 전설’이 번진다. 차라리 단풍이 들려주는 ‘가을의 전설’이라면 낭만이라도 있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가을의 전설’은 대개 10월에 문이 열린다. 누구나 색다른 ‘가을의 전설’을 가꿔봄직하지 않을까, 마음이라도 넉넉한 한가위와 함께.

〈김학순 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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