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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매파와 비둘기파

입력 : 2007-01-05 18:07:22

고대 이스라엘이 로마제국을 상대로 줄기차게 독립운동을 하다가 서기 60년대 후반 중과부적(衆寡不敵)의 상황에 빠지고 만다. 그러자 유대 독립군 안에서는 결사항전해야 한다는 매파와 더 이상 싸우면 민족까지 멸망한다는 비둘기파가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다. 마치 병자호란이 터졌을 때 조선의 조정이 주전론자(主戰論者)와 주화론자(主和論者)로 나뉘었던 상황과 흡사했다.

독립군이 연전연패하자 결사대의 비둘기파인 한 랍비가 로마군 사령관이던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간다. 이 랍비는 쇠사슬에 묶여 사령관 앞에 끌려갔다는 주장도 있긴 하다. 어쨌든 이 랍비는 사령관이 곧 황제가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의 예언이 맞아 떨어지자 사령관은 그에게 소원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선심을 썼다. 랍비는 너무나 소박한 소원을 제시했다. “학교 하나만은 파괴하지 말아주십시오.” 황제가 된 사령관은 예루살렘을 모두 파괴했지만 학교 하나는 남겨 두었다. 일부 역사가들은 오늘의 유대인들이 있게 된 것은 욕을 먹으면서도 비둘기파가 된 랍비 덕분이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물론 그가 로마 편에 서서 호의호식을 하며 구차하게 목숨을 부지했다는 혹평은 끊임없이 따라다닌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든 전쟁의 필요성이 대두할 때는 매파와 비둘기파가 대립각을 세우게 마련이다. 하지만 영웅은 대개 매파에서 탄생한다. 중국에서 통시대적 영웅인 남송의 장수 악비(岳飛)가 그렇듯이. 비둘기파는 지혜가 있을지언정 매력적으로 보이기는 쉽지 않아서다.

적자생존의 일터에서 역시 살아남으려면 비둘기파보다 매파가 유리하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했다. 또 권위주의 조직일수록 매파가 득세하는 게 기개와 절조 같은 덕목이 먹혀들기 때문이다. 어떤 사안을 놓고 매파와 비둘기파가 대립할 때 매파의 의견이 더 잘 먹히는 것은 인간 심리구조가 매파에 유리하기 때문이라는 저명한 학자들의 견해가 미국에서 나온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비둘기파가 평가를 받으려면 시간이 한참 지난 뒤 역사를 기다려야 하는 경우가 많다. 석학들도 지적했듯이 인간 심리의 낙관주의적 편향성으로 말미암아 비둘기파의 균형감각은 어디서든 제 대접을 받기 힘든 세상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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