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적(餘滴)

[여적] 길

입력 : 2007-02-23 18:03:59

“나를 키운 건 8할이 길이었다.” 한 여행가는 ‘길 예찬론’을 이렇게 편다. “스물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8할이 바람이다”라고 읊조린 서정주 시인의 ‘자화상’ 한 구절을 패러디한 것이다. 여행가가 아니더라도 길을 나서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함께 가는 길이 대개는 즐겁지만 혼자 떠나는 길이라고 외롭지만은 않다. 우리 앞 길에는 수려하고 정감이 넘치는 길과 험난한 가시밭길이 언제나 공존한다.

가고 싶지 않은 길을 가야할 때도 많다. 힘겨운 고갯길에서 한숨을 내쉬지만 내리막길에서는 한번쯤 휘파람을 불어본다. 골목길과 고샅길을 지나면 한길이 나온다. 비탈길, 벼랑길, 자갈길을 가면서 때론 주저앉고 싶지만 곧 반가이 맞아줄 포장길과 꽃길을 떠올린다.

숲길과 오솔길, 돌담길은 낭만과 운치를 뽐낸다. 외딴길과 두렁길, 들길은 호젓함과 특유의 정취가 배어난다. 갈림길에선 마음이 흔들리기도 한다. 막다른 길에선 당혹감을 맛본다. 빗길, 눈길은 흙탕길과 진창길이기 십상이다. 피난길, 도붓길에서는 역사의 뒤안길 영상이 먼저 떠오른다.

꼬부랑길은 ‘곧은 길만 길이 아니다’라고 소리없이 아우성친다. 지름길과 샛길이 빠른 것처럼 보이지만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게 인생의 묘미다. 고향 가는 길은 두멧길, 황톳길, 덤불길이라도 설렌다. 추억이 깃든 길은 다시 가고 싶다. 연인끼리 손잡고 가는 길은 더없이 정겹다. 마침내 피할 수 없는 것은 비감하지만 황천길이다.

문인들의 ‘길’에도 이런 애환이 고스란히 녹아있다. 도종환의 ‘가지 않을 수 없는 길’과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은 그래서 여운이 길다. 박노해의 ‘굽이 돌아가는 길’은 ‘서둘지 말아야 할 길’의 지혜를 전수한다. 최인호의 ‘길 없는 길’은 해탈의 경지를 표상한다.

이렇듯 우리네 삶과 떼어놓을 수 없는 길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 오는 4월 전국적으로 시행되는 새 주소체계에 맞춰 진행되고 있다. 이미 길을 다 간 역사의 인물이나 꽃 같은 친숙한 이름을 붙인다고 한다. 편리함 못지 않게 소중함이 깃든 이름이면 금상첨화이겠다.

'여적(餘滴)'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여적] 금지된 사랑  (0) 2007.03.09
[여적] 죽음의 무게  (0) 2007.03.02
[여적] 한족(漢族)  (0) 2007.02.16
[여적] 하버드 교양필수  (0) 2007.02.09
[여적] 작은 감동  (1) 2007.0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