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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역설의 정치

입력 : 2007-04-06 18:07:36

1999년 미국 콜로라도주 리틀턴의 콜럼바인 고교에서 벌어진 총기난사사건은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12명의 무고한 생명이 희생된 이 사건은 다큐멘터리 감독 마이클 무어가 영화 ‘볼링 포 콜럼바인’을 만들어 한층 더 유명세를 치렀다. 이 영화는 2003년 아카데미상 다큐멘터리 부문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은 같은 소재로 극영화 ‘엘리펀트’를 제작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파장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이 사건을 접한 호주 콴타스항공의 최고경영자 제프 딕슨이 쓴 시는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덧붙여 가는 기(奇)현상까지 낳았다. 댓글이 아니라 시 자체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우리 시대의 역설(逆說)’이라는 시 제목부터 인상적이다.

“건물은 높아졌지만 인격은 더 작아졌다/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시야는 더 좁아졌다/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더 많은 물건을 사지만 기쁨은 줄어들었다/집은 커졌지만 가족은 더 적어졌다/더 편리해졌지만 시간은 더 없다/학력은 높아졌지만 상식은 부족하고/지식은 많아졌지만 판단력은 모자란다/전문가들은 늘어났지만 문제는 더 많아졌고/약은 많아졌지만 건강은 더 나빠졌다(후략)”

문학에서 ‘역설’의 기능은 독자의 감흥을 자아내는 데 있다. ‘가장 많이 고친 사본이 대개 가장 부정확한 사본이다’라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명구(名句)는 문학적 역설의 오랜 본보기이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에서 집단농장에 내려진 제1계명도 재기발랄한 역설 가운데 하나다.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어떤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한·미 자유무역협정 타결 이후 한국 정치에서도 ‘역설의 정치학’이 흥미롭게 목격되고 있다. 사사건건 노무현 대통령을 물고 늘어지던 한나라당과 보수진영이 청와대가 어리둥절할 정도로 연일 찬가를 불러대는 반면 동지였던 범여권의 핵심인사들이 단식 투쟁까지 벌이면서 반대 목소리를 높이는 것은 보기 드문 역설임에 틀림없다. 버려야 얻을 수 있고, 져야 이기며, 살려면 죽어야 한다는 게 정치권을 관류하는 ‘역설의 미학’이긴 하다. 그래서 정치는 패러독스에 묘미가 있다고들 하지만 뒷맛이 개운치만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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