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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산책 회담

입력 : 2007-11-16 18:02:51

산책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베토벤은 귀가 안 들리기 시작한 뒤부터는 사람들과의 대화보다 자연과의 대화를 더 즐겼다. 베토벤의 말년 일과는 오후 2시까지 일을 끝낸 뒤 저녁때까지 산책을 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때로는 모두가 잠든 시간까지 산책만을 할 때도 있었다. 그가 여름마다 찾던 빈 교외의 하일리겐시타트에는 ‘베토벤의 산책로’가 운치있게 후세인들을 맞아준다. ‘전원교향곡’이 1808년 여름 이곳에서 작곡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산책에 취한 명사가 베토벤뿐이겠는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 로버트 프로스트, 장 자크 루소, 아르튀르 랭보, 빅토르 세갈렌, 로버트 스티븐슨, 피에르 상소…손가락으로는 다 꼽기 어려우리라.

특히 소로는 스스로 직업적 산책자라고 일컫는다. 산책자는 자연을 ‘서재’삼아 ‘낙타처럼’ 사색을 즐기며 걸을 줄 알아야 한다는 게 그의 낭만적인 지론이다. 프랑스 사회학자 다비드 르 브르통은 한결 문학적으로 산책과 걷기를 찬미한다. “걷기는 세계를 느끼는 관능에로의 초대다.” 일본 도쿄대 부속병원 내과의사 구리타 마사히로는 산책을 ‘최고의 사치’라는 수사학까지 펼친다.

산책은 혼자하는 맛이 제격이지만 마음 맞는 사람과 호젓하게 함께 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다. 부드러운 감성에 호소하는 산책은 외교에도 곧잘 애용된다. 딱딱하고 격식을 갖춘 회담 사이사이에 윤활유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국가 정상들 간의 회담에서는 인기 메뉴 가운데 하나다. 노무현 대통령과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가 제주 정상회담 기간 동안 산책 회담을 하는 광경에서는 늘 껄끄럽기만 하던 한·일관계를 체감하기 어려웠다.

엊그제 한덕수 국무총리와 북한의 김영일 내각총리가 공식 회담을 앞둔 이른 아침 워커힐 호텔 주변을 거닐며 환담하는 정경은 살갑고 이채로웠다. 긴장감을 털어버리고 ‘추일서정(秋日抒情)’을 만끽하며 산책 대화를 나누는 남북 총리들의 모습이 그동안의 남북회담과는 사뭇 다른 장면이었기 때문이다. 기선을 제압해 오로지 많은 양보를 얻어내는 일에만 골몰하는 고전적인 협상과 비교하면 상전벽해를 보는 듯하다. 이처럼 모든 남북회담이 기상변화가 무쌍하지 않고 상생의 마당으로만 쓰임새가 정착되면 오죽 좋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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