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7-11-09 15:40:27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윌리엄 엥달|길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자꾸자꾸 예뻐지면 나는 어떡해. 거울 속의 나를 보면 정말 행복해. 미녀는~ 미녀는 석류를 좋아해.” 꽃미남 배우 이준기가 출연한 한 음료 CF송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재기발랄한 누리꾼이 댓글을 달았다. “미국에서도 유사품 출시 예정. ‘부시는 석유를 좋아해’” 또 다른 네티즌의 패러디 버전이 이어진다. “미국은 석유를 좋아해. 자꾸자꾸 빼앗으면 우린 어떡해. 석유로 번 돈을 보면 정말 행복해. 미국은~ 미국은 석유를 좋아해.”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구실삼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속셈은 막상 석유에 있다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풍자다. 최근의 전쟁들이 이처럼 한결같이 석유 지배권을 둘러싼 다툼이라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싶은가. 그러면 석유를 지배하라. 모든 석유를, 어디에서든.” 벨기에 저술가 미셸 콜론이 미국의 행태를 보며 씁쓸하게 던진 한 마디다. 사실 이 말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에너지를 지배하라, 그러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오래 전에 갈파한 것과 수사만 다를 뿐이다.
윌리엄 엥달이 쓴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원제 A century of war, Anglo-American oil politics and the new world order)은 바로 그 석유의 눈으로 본 한 세기의 역사다. 그것도 패권국가 영국과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을 겨냥한 것이다. ‘겨냥했다’는 표현은 미국의 언론인이자 비주류 경제학자인 글쓴이의 극히 비판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음모론이 전편(全篇)을 지배하는 게 아니냐고 또 다른 음모론적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를 만큼 신랄하다. 문장이 신랄한 게 아니라 고갱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비밀문서와 자료를 바탕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빼앗아간다.
저자는 먼저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것은 바로 석유의 중요성을 맨먼저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882년 9월 영국에는 장차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비결은 석유에 있다는 전략적 함의를 꿰뚫고 있던 피셔 제독이 있었다. 당시 함장이던 그는 부피가 큰 석탄 화력추진형 군함에서 새로운 석유 연료형 군함으로 바꿔야 한다고 정부 관리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해 나갔다.
석유를 때는 디젤 모터로 동력을 얻는 전함은 연기를 전혀 내지 않아 적에게 들킬 염려가 없는 데 반해 석탄을 때는 배는 내뿜는 연기가 10㎞ 밖에서도 선명하다. 석탄 배의 모터는 4~9시간이 지나야 완전 가동되지만 석유 모터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전함 한 척에 기름을 공급하려면 12명의 인원이 12시간 작업하면 끝이지만 석탄 배는 500명의 인원이 5일 동안 작업해야만 한다. 다른 장점도 수없이 많지만 이 정도만 해도 더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괴짜 몽상가 취급을 당하던 피셔 제독의 의견이 먹혀들지 않았으면 영국의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20세기 초 영국이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데는 석유가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종전협정 직후 연합군의 전승 만찬장에서 프랑스 상원의원이자 전시 석유총위원장인 앙리 베랑제가 “석유가 승리의 피였다”고 만찬사를 요약한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독일이 철과 석탄에 대한 자국의 우위를 과신해 석유에 대한 연합군의 우위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석유를 가장 먼저 안 것은 막상 독일이었지만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석유가 세계사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고비가 된 것은 ‘일곱 자매(Seven Sisters)’로 불리는 영·미 카르텔의 탄생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경제질서를 형성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미국과 영국의 세계 석유지배권과 맞닿아 있으며, 유럽부흥계획인 마셜 플랜도 미국의 5대 석유회사와 영국의 2대 회사가 결정적인 배후세력이었다고 저자는 논증한다.
‘일곱 자매’라는 별명을 처음 만들어 붙이고 이들 골리앗 카르텔과 맞서 싸우던 다윗이었던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 엔리코 마테이가 어느날 갑자기 비행기 사고로 숨지는 슬픈 비화(비話)에서는 비장감이 배어나온다.
냉전기간 동안 석유가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규정하고 소련이 붕괴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은이는 정곡을 찌른다.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 냉전 종식 이후 벌인 미국의 군사행동을 규율한 석유는 구 유고슬라비아연방이 해체되는 과정과도 직결돼 있다고 분석한다. 흔히 인종청소의 반인륜 범죄를 처단하기 위해 밀로셰비치 정권을 붕괴시킨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막은 미국의 석유 전략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전쟁 가운데 석유와 무관한 전쟁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코소보 전쟁은 물론 아프리카 내전, 영국의 아르헨티나 공격 등도 하나같이 석유 때문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흥미로운 사실도 적지 않게 밝혀진다. 오일쇼크를 일으킨 주체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아니라 그들을 뒤에서 조종한 영국과 미국의 세력이었다든가,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각종 환경단체들이 석유업계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 등이다.
‘검은 황금’ ‘현대 문명의 으뜸 재화’로 불리는 석유의 배럴당 100달러 돌파가 시간문제라는 기사가 연일 지면을 장식하는 지금 이 책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주고도 남을 듯하다. 서미석 옮김 1만8000원
대량살상무기 제거를 구실삼아 이라크를 침공한 미국과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속셈은 막상 석유에 있다는 것을 비아냥거리는 풍자다. 최근의 전쟁들이 이처럼 한결같이 석유 지배권을 둘러싼 다툼이라는 것은 이제 공공연한 비밀도 아니다.
“세계를 지배하고 싶은가. 그러면 석유를 지배하라. 모든 석유를, 어디에서든.” 벨기에 저술가 미셸 콜론이 미국의 행태를 보며 씁쓸하게 던진 한 마디다. 사실 이 말은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이 “에너지를 지배하라, 그러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고 이미 오래 전에 갈파한 것과 수사만 다를 뿐이다.
윌리엄 엥달이 쓴 ‘석유 지정학이 파헤친 20세기 세계사의 진실’(원제 A century of war, Anglo-American oil politics and the new world order)은 바로 그 석유의 눈으로 본 한 세기의 역사다. 그것도 패권국가 영국과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을 겨냥한 것이다. ‘겨냥했다’는 표현은 미국의 언론인이자 비주류 경제학자인 글쓴이의 극히 비판적인 시각을 반영한다. 음모론이 전편(全篇)을 지배하는 게 아니냐고 또 다른 음모론적 의문을 제기할지도 모를 만큼 신랄하다. 문장이 신랄한 게 아니라 고갱이가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다양한 비밀문서와 자료를 바탕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빼앗아간다.
저자는 먼저 영국이 ‘해가 지지 않는 제국’으로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것은 바로 석유의 중요성을 맨먼저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1882년 9월 영국에는 장차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비결은 석유에 있다는 전략적 함의를 꿰뚫고 있던 피셔 제독이 있었다. 당시 함장이던 그는 부피가 큰 석탄 화력추진형 군함에서 새로운 석유 연료형 군함으로 바꿔야 한다고 정부 관리들을 논리적으로 설득해 나갔다.
석유를 때는 디젤 모터로 동력을 얻는 전함은 연기를 전혀 내지 않아 적에게 들킬 염려가 없는 데 반해 석탄을 때는 배는 내뿜는 연기가 10㎞ 밖에서도 선명하다. 석탄 배의 모터는 4~9시간이 지나야 완전 가동되지만 석유 모터는 30분이면 충분하다. 전함 한 척에 기름을 공급하려면 12명의 인원이 12시간 작업하면 끝이지만 석탄 배는 500명의 인원이 5일 동안 작업해야만 한다. 다른 장점도 수없이 많지만 이 정도만 해도 더 비교할 필요가 없다. 그렇지만 괴짜 몽상가 취급을 당하던 피셔 제독의 의견이 먹혀들지 않았으면 영국의 미래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20세기 초 영국이 1차 세계대전을 연합국의 승리로 이끌었던 데는 석유가 있었음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종전협정 직후 연합군의 전승 만찬장에서 프랑스 상원의원이자 전시 석유총위원장인 앙리 베랑제가 “석유가 승리의 피였다”고 만찬사를 요약한 것만 봐도 알만하지 않은가. 독일이 철과 석탄에 대한 자국의 우위를 과신해 석유에 대한 연합군의 우위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다. 석유를 가장 먼저 안 것은 막상 독일이었지만 앞을 내다보지 못했다.
석유가 세계사에서 또 하나의 중대한 고비가 된 것은 ‘일곱 자매(Seven Sisters)’로 불리는 영·미 카르텔의 탄생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국제경제질서를 형성한 브레턴우즈 체제가 미국과 영국의 세계 석유지배권과 맞닿아 있으며, 유럽부흥계획인 마셜 플랜도 미국의 5대 석유회사와 영국의 2대 회사가 결정적인 배후세력이었다고 저자는 논증한다.
‘일곱 자매’라는 별명을 처음 만들어 붙이고 이들 골리앗 카르텔과 맞서 싸우던 다윗이었던 이탈리아의 민족주의자 엔리코 마테이가 어느날 갑자기 비행기 사고로 숨지는 슬픈 비화(비話)에서는 비장감이 배어나온다.
냉전기간 동안 석유가 세계 곳곳에서 미국의 대외정책을 규정하고 소련이 붕괴하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지은이는 정곡을 찌른다. 이라크 전쟁을 비롯해 냉전 종식 이후 벌인 미국의 군사행동을 규율한 석유는 구 유고슬라비아연방이 해체되는 과정과도 직결돼 있다고 분석한다. 흔히 인종청소의 반인륜 범죄를 처단하기 위해 밀로셰비치 정권을 붕괴시킨 것으로 알고 있지만 내막은 미국의 석유 전략이 깊숙이 개입돼 있다는 것이다.
책을 읽다보면 현대전쟁 가운데 석유와 무관한 전쟁은 없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코소보 전쟁은 물론 아프리카 내전, 영국의 아르헨티나 공격 등도 하나같이 석유 때문이었음이 드러난다.
이 책에서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는 흥미로운 사실도 적지 않게 밝혀진다. 오일쇼크를 일으킨 주체는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아니라 그들을 뒤에서 조종한 영국과 미국의 세력이었다든가, 핵발전소 건설을 반대하는 각종 환경단체들이 석유업계의 후원을 받았다는 점 등이다.
‘검은 황금’ ‘현대 문명의 으뜸 재화’로 불리는 석유의 배럴당 100달러 돌파가 시간문제라는 기사가 연일 지면을 장식하는 지금 이 책은 온고지신(溫故知新)의 지혜를 주고도 남을 듯하다. 서미석 옮김 1만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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