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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안녕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어라

입력 : 2007-11-30 15:54:07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이레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나 하늘로 돌아가리라/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기슭에서 놀다가/하늘로 돌아가리라/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20세기 최고의 정신의학자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책은 대부분 삶을 아름다운 소풍에 비유한 천상병의 시 ‘귀천(歸天)’을 떠올리게 한다. 지난해와 올 초에 걸쳐 국내 서점가를 지배했던 베스트셀러 ‘인생 수업’과 ‘상실 수업’이 우선 그렇다. 그에 앞서 나온 ‘죽음의 순간(인간의 죽음)’ ‘사후생’도 마찬가지다.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언젠가 죽음을 ‘은하수로 춤추러 가는 것’이라고 은유한 적이 있는 로스이고 보면 그의 뇌리에 관류한 죽음의 의미는 차라리 축복처럼 살갑게 다가온다.

우리는 바람에 흩날리는 한 줌의 먼지가 아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아름다운 눈송이다. 이 우주에 똑같은 눈송이는 없듯이 말이다.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는 우리가 마지막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있기 위해 자신의 삶을 소중하게 보듬어야 한다고 말한다. 사진은 미국 캘리포니아 에스콘디도에 세워진 명상의 집 ‘샨티 닐리야’에서의 로스.


로스 박사의 초기 저작 가운데 하나인 ‘안녕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 진정으로 살아 있어라’(원제 To Live Until We Say Good-Bye) 역시 아름다운 죽음을 음유하고 증언한다. 죽음을 앞둔 4명의 시한부 환자들과 나눈, 애절하면서도 담담한 체험담은 삶과 죽음의 철학을 극명하게 소묘하고 있다. 지은이와 여섯달 동안 동행한 사진작가 말 워쇼의 사생적이면서도 감각적인 사진들이 곁들여져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하지 않을 만큼 감동을 배가해 준다.

책에 등장하는 시한부 환자들은 성(性)과 직업, 나이가 각기 다르면서도 로스 박사를 만나고부터 하나같이 편안하고 기품 있는 최후를 맞이한다.

먼저 모델이자 철학자요, 시인인 베스는 암환자였다. 외모는 물론 내면적으로도 놀라운 능력을 겸비한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마흔두 살이었던 베스는 마지막날까지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암 환자들은 외모도 흉하고 냄새도 고약하다는 세상의 통념과는 달리 그녀는 언제나 자신을 가꾸었다.

그가 남긴 글에서는 고통과 번민 같은 어두운 그림자는 찾아 볼 수 없다. “어쩌면 죽음이라는 건, 뜨거운 태양을 너무 오래도록 바라보다가 마침내 서늘하고 어두운 방안에 들어섰을 때 느끼는 안도감 같은 것이 아닐까요?” 그의 시집 마지막 장에는 이런 구절도 적혀 있었다. “내게 남아 있는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남김 없이 살아버려라!”

다섯 살 난 제이미는 완치가 불가능한 뇌종양을 앓다가 세상과 작별했다. 그 어린 제이미는 엄마와 로스 박사의 보살핌 덕분에 놀랍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음은 물론 죽음 뒤의 삶도 생각하고 있었다. 제이미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짧은 편지와 자유로운 영혼으로 하늘을 날아가는 그림을 그려 엄마에게 더없이 소중한 선물로 남겼다.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지만 어머니 린다의 얼굴에서는 슬픔과 두려움 대신 평화와 자부심, 만족감이 흘러나왔다.

유방암 판정을 받은 뒤 쉰아홉 살로 세상을 등진 루이스는 베스가 마지막 순간까지 시를 썼던 것처럼 죽음을 눈앞에 두고 침대에 앉아 있을 수 없을 때까지 그림을 그렸다. 자신의 모교에서 전시회를 여는 꿈까지 이룬 뒤 평화롭게 하직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일흔 한 살의 간암환자인 잭은 공사장 노동자와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며 평생을 고단하게 살아왔다. 하지만 요양원 생활을 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작은 인형의 집을 만들며 창의성을 발현하는 기쁨과 평화를 맛보는 즐거움으로 죽음을 맞았다.

주인공 4명의 남은 가족들에게서도 슬픈 만가(輓歌)는 한결같이 들려오지 않았다. 이 책은 이렇듯 죽음을 목전에 둔 시한부 환자들이 평온한 마음으로 세상과 이별을 준비할 수 있도록 따사롭게 격려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을 염려하며 불안해 하는 가족과 지인들에게도 소중한 지침과 용기를 북돋워 준다.

지은이 로스는 자신도 중풍으로 쓰러져 2004년 귀천하기 전까지 9년 동안 온몸이 마비되는 고통을 경험했기에 죽음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말년 들어 한층 절절할 수밖에 없다. 그는 전세계 호스피스 운동의 선구자이기도 하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연구에 평생을 바친 그를 시사주간지 ‘타임’이 ‘20세기 100대 사상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한 것은 그래서 당연한지도 모른다. 로스는 죽어가는 사람들 앞에 앉아서 그들이 죽어가는 것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가를 감히 반복적으로 질문한 최초의 과학자다. 미국에서는 그가 ‘죽음의 문제를 벽장에서 처음으로 끄집어냈다’는 호평도 덧붙인다.

그의 자서전 ‘생의 수레바퀴’는 이렇게 말문을 연다. “사람들은 나를 죽음의 여의사라고 부른다. 30년 이상 죽음에 대한 연구를 해왔기 때문에 나를 죽음의 전문가로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 같다. 내 연구의 가장 본질적이며 중요한 핵심은 삶의 의미를 밝히는 일에 있었다.”

2만5000가지 죽음의 실례를 연구한 로스는 인간의 죽음을 나비가 고치를 벗어던지듯 그저 육체를 벗어나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이 “죽음은 육체로부터의 해방이다”라고 했던 것처럼.

‘안녕이라고 말하는 그 순간까지…’는 200여 쪽으로 두껍지 않은 책이지만 긴 제목만큼이나 길고 깊은 울림이 전해온다. 29년 전에 처음 나온 이 책에서는 여전히 행간과 갈피마다 지은이의 안온한 마음이 샘솟는 듯한 느낌이 짜릿하게 감지된다. ‘인생수업’ ‘상실 수업’에서 만족감을 얻은 독자라면 이 책에서도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것 같다. 이진 옮김. 1만1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