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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진정한 ‘나’란 없다

입력 : 2007-10-19 15:12:28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베르너 지퍼·크리스티안 베버|들녘

마흔살의 여성 로슬린 Z는 자신이 남자라고 믿는다. 스스로를 자기 아버지라고 믿었으나 이따금 할아버지라고 말한다. 아버지 이름으로 불러야 대답하고, 서류 서명도 아버지 이름으로 한다. 삶의 이력에 대한 질문에 아버지의 인생을 설명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로슬린은 카프그라 증후군을 앓고 있는 정신분열증 환자다. 그것도 자기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고 여기는 극히 특수한 내적 변신 사례다.

쉰한살의 건축 노동자 토미 맥휴는 가벼운 뇌출혈을 겪고 나서 혁명에 가까운 경험을 한다. 응급수술을 받은 지 2주일 만에 갑자기 그럴 듯한 시를 쓴다. 뿐만 아니다. 솜씨를 인정받아 여러 화랑에서 작품 전시회까지 여는 미술가가 됐다. 과학적으로도 소명하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과연 사실일까. 최근 연구결과는 기억이란 ‘나’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박정석(‘하우스’에서)


영화 ‘매트릭스’의 여자 주인공 트리니티가 ‘경험된 가상’을 남자 주인공 네오에게 설명하면서 던지는 이런 물음과 흡사한 광경이다. “완벽하게 현실인 듯한 꿈을 꾸어 본 적이 있어? 네가 이 꿈에서 다시는 깨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어느 게 실제이고 어느 게 꿈인지 어떻게 알지?”

로슬린 Z와 토미 맥휴에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 극단적인 두 사례에서 엿보이듯이 ‘진정한 나’의 정체성은 우리가 아는 상식과는 달리 혼란스럽기 그지없다.

독일 과학 저널리스트 베르너 지퍼와 크리스티안 베버가 함께 지은 ‘나, 마이크로 코스모스’(원제 ICH, Wie wir uns selbst erfinden)는 철학이나 종교적으로만 들리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를 과학적으로 궁구한다. 종반부를 보면 자연과학과 철학·종교의 접목이라고 해도 좋을 듯하다. 과학자가 아닌 일반 독자들은 이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지도 모른다. 느닷없이 멀쩡한 ‘나’를 잃어버릴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 있어서다. 실제로 여러 명의 ‘나’로 인식되거나 ‘나’가 아닌 것으로 자각되는 생생한 실례들이 상상 이상으로 많이 등장한다.

그래선지 지은이들은 들머리에 먼저 ‘부작용에 대한 경고’를 써 붙였다. 혹시 책을 읽고 미혹(迷惑)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해서일까? 아무튼 경고문의 제목이 더 겁을 주는 듯하다. ‘인간의 기억은 위대한 쇼다.’

성자(聖者)들은 흔히 ‘진정한 나는 내 안에 있다’며, 깨달음이 ‘진정한 나’를 찾는 길이라고 안내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나’란 것은 없다고 결론짓는다. 인류가 여태껏 생각하던 ‘나’는 ‘조작된 나’일 뿐이라고 선언한다. 그런 점에서는 불교와 라마교에서 ‘나’가 없다는 명제와 일치하는 것 같다.

인간이 ‘나’를 구축할 수 있는 것은 따지고 보면 순전히 ‘기억’ 덕분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사실이라고 굳게 믿는 이 기억은 거의 만들어진 것에 가깝다고 지은이들은 최근 연구결과를 토대로 입증한다. 결국 기억이라는 게 ‘나’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연극’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매듭짓는다. 기억은 한정된 뇌 영역에 저장됐다가 ‘자서전적인 나’를 구성하는데, 이런 나에게서 기억을 뺀다면 더 이상 ‘나’가 아닌 것이다.

이 책은 인류가 수백만년 동안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는 숙제인 ‘참 나’에 관한 탐구를 오싹한 연역법으로 전개해 나간다. 그것도 시종 기존 관념을 무너뜨리며 앞으로 나아간다.

몇 가지만 들어보자. 마음과 몸을 이원적으로 생각하던 ‘심신이원론(心身二元論)’은 틀렸다. 마음은 백지장 같고 경험에 의해 모든 지식이 쌓인다는 경험론도 허구다. 나 안에는 고정된 성격이란 없다. 통일된 사령부가 없는 것은 물론 ‘왕이 없는 제국’이다.

새로운 견해와 학설도 적잖게 소개된다. 인간은 자유, 자유의지를 지니고 있다는 기존의 견해는 일종의 ‘망상’이다. 어린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많은 것을 안다. 한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성격이 혼재할 수 있다. 사람의 성격은 쉰살이 넘어도 변한다. 성역처럼 여겨지던 프로이트식 무의식이 어린 시절에 결정된다는 이론이 무너지는 것이다.

이런 사실들은 물론 저자들이 새로 발견하거나 창조한 내용은 아니다. 다양한 전문가들을 인터뷰하면서 축적한 지식의 집합체다. 구슬을 꿰어 보배를 만든 것에 비유할 수 있겠다. 여기에는 정신의학자, 심리학자, 사회학자, 민족학자, 문화학자, 철학자, 종교학자, 신경학자들의 노력이 망라됐다. 그 가운데서도 신경과학자들의 연구 성과와 사례가 풍성하게 인용된다.

책에는 전문가들만이 쉽게 알 수 있는 생경한 전문용어들이 많이 나타나지만 보통 독자들의 눈높이를 감안한 언론인들의 글솜씨인지라 능히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는 가면을 쓰고 있는 것 같아. 진정한 나를 찾아야 해’ 하고 자아찾기 여행을 떠나는 사람이 적지 않을 게다. 그런데 ‘나’가 없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저자들은 이렇게 충고한다. “여러분의 ‘내’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말 것. 하지만 여러분의 인생은 진지하게 받아들일 것.” 그리고 나서 저자들은 자연과학도답지 않게 사회과학적인 마무리 말을 던진다. “‘나’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나’라고만 말하는 것은 타락이며, 스스로를 해체하는 행위다. ‘나’는 ‘우리’ 안에서만 생각할 수 있다.” 저자들의 마지막 메시지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인 셈이다. ‘소우주’인 ‘나’에 대한 긴 탐험의 맺음말로는 좀 엉뚱한가? 전은경 옮김 1만3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