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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한국은 지금 올바로 가고 있는가

입력 : 2007-12-14 17:19:33

▲만남…서경식·김상봉|돌베개

그들의 ‘만남’은 운명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필연적이라는 편이 더 나을 듯하다. 두 지식인은 시대의 슬픔과 고통을 객관적으로 승화시켜가고 있는 ‘길벗’이 되어야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일 조선인 지식인 서경식과 ‘서로주체성’의 철학자 김상봉은 같은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아나섰다 해도 좋을 것 같다. 두 사람은 ‘외로운 디아스포라’라는 공통분모를 지녔을지도 모른다. 서경식이 밖의 디아스포라라면 김상봉은 안의 디아스포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민족적 이산(離散)을 뜻하는 디아스포라가 요즘 들어 전쟁·식민화의 역사나 경험과 깊이 결부된 난민·이민 상황을 의미하는 넓은 맥락으로 변용되고 있는 점에 비춰보면 더욱 그렇다.

두 사람의 만남은 결코 가벼울 수 없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진중할 수밖에 없다. 그들 삶의 역사가 고통이요, 슬픔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경식은 서승, 서준식 두 친형이 박정희 독재체제에서 조작된 이른바 ‘재일교포 형제간첩단사건’으로 장기복역하는 동안 뒷바라지를 하는 남다른 아픔을 겪었다. 그러는 사이에 그는 아우슈비츠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이탈리아계 유대인 프리모 레비의 흔적을 찾으며 디아스포라 탐구에 천착한다.

두 사람의 만남에서 ‘만남’이란 책이 엮어진다. 서경식과 김상봉의 대담집 ‘만남’은 지난 5월19일부터 8월15일까지 아홉차례에 걸쳐 40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정리한 책이다. 대담은 한국 현대사의 성찰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현실 속의 구체적 현안으로 지평을 넓혀간다. 5·18 광주민중항쟁, 6·10 민주항쟁에서 해방공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가 하면 통일, 교육, 비정규직 노동문제 같은 첨예한 논쟁주제도 비켜가지 않는다. 게다가 교양, 예술, 종교, 언어 문제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담론을 펼쳐 놓는다.

이 때문에 자칫 논의가 산만해진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으나 풍성하면서도 쉽게 접할 수 없는 역사적 일화와 철학적 깊이가 이를 덮어주고 남는다. 내공이 남다른 두 진보적 지식인의 세밀한 사유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프롤로그를 위한 탐색전이 끝나면 곧바로 5·18이 핵심 논제로 떠오른다. 해직교수 시절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던 김상봉이 전남대 교수로 일자리가 정해진 데다 대담 시작 직전 5·18 기념행사 주제 발표를 한 뒤끝이어서 자연스레 말길이 풀려간 것이다. 서경식은 5·18이 조선(한국)의 특수한 상황, 광주와 전남이라는 고유한 맥락 속에서 발생한 것이지만 민족적인 고유성이나 지역적인 문맥에 갇히게 해서는 안되며 바깥으로 열려야 한다고 역설한다. 이에 대해 ‘5·18의 철학자’ 김상봉은 5·18의 고유성이라는 것 자체가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응답이고, 연대였으며, 보편성을 지향한 것이라고 정리한다.

두 사람은 87년 체제 이후 한국 사회의 굵직한 과제를 더듬어 보면서 민족주의, 탈민족주의, 민주주의의 위기를 고민한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를 살피고 재일동포들의 삶을 유대인의 디아스포라와 비교하기도 한다. 서경식은 1940년대 우리의 해방공간을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와 함께 그려본다. 그래서 그는 역사란 절대로 지나간 것이 아니라는 걸 설파한다.

서경식이 꿈꾸는 미래의 고향은 ‘디아스포라 공동체’이고, 김상봉이 그리워하는 것은 ‘씨알의 나라’다. 김상봉의 ‘서로주체성’은 서경식의 디아스포라적 주체의 자기분열과 교감한다. 김상봉에게 ‘서로주체성’은 홀로주체성과 이항대립관계다.

김상봉은 우리의 근현대사를 ‘현존 국가기구’와 ‘씨알들의 나라’의 대립 속에서 파악한다. 민중이 역사의 중심이 되는 ‘씨알들의 나라’는 함석헌이 이상사회로 여기던 바다.

이렇듯 두 지식인의 대담은 ‘관점이 있는 대화’다. 우리 사회의 안과 밖에서 고민해 온 난제들에 대한 관찰자의 눈이 날카롭게 번뜩인다. 대화를 통해 지적 초원에 이르고자 한다. 그 곳은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열린 공동체다.

두 지식인의 만남은 소통이다. 그렇지만 소통이 쉬울 리는 없었다. 두 사람 모두 한국인의 피가 흐르지만 50년 넘게 살아온 사회의 언어와 문화가 다르다. 학문적 배경이 다름은 물론이다. 대담은 외교적인 언술이 과감하게 생략돼 때론 긴장감이 돌기도 한다. 서경식은 비유법을 들어 후일담을 들려준다. “마치 목욕하기 전에 욕조의 물이 너무 뜨겁지나 않은지 확인이라도 하듯, 어색하고 조심스럽게 시작되었다.”

하지만 두 지식인의 대화는 이내 큰 틀에서 의기투합하고, 넓이와 깊이가 단박에 느껴진다. 진보적인 시각을 공통적으로 지녔음에도 차이가 감지되면서 박진감과 긴장감이 튀어나온다. 해박하고 다채로운 대화가 때로는 치열한 것도 그런 차이에서 말미암는다. 무엇보다 김상봉이 갈구한 이론들의 한쪽에는 플라톤과 칸트가 있고, 반대편에는 마르크스가 존재하는 데다 특유의 ‘서로주체성’이 어우러져 사색의 폭이 녹아난다. 김상봉은 진리는 슬픔 속에 있다는 생각을 대화에서 집요하게 반추한다. 그에게 슬픔은 ‘보편적으로 승화된 고통으로서의 슬픔’이기 때문이다.

책은 최근 출판동네에서 자주 눈에 띄는 대담집으로 꾸며졌지만 헛된 말의 향연이 아니라 구체성을 담은 모색이 두드러진다. 서경식의 희망대로 독자들에게 지적 흥분을 주기에 충분하다는 느낌이 든다. 1만7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