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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육조 거리

입력 : 2007-12-14 18:19:28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였던 곳에는 어김없이 주작대로(朱雀大路)가 존재한다. 남쪽으로 난 큰 도로다. 황제는 대로 양옆에 관아를 끼고 남면(南面)해 우주의 질서를 현세에 펼친다고 여겼다. 당나라 때 주작대로의 너비는 무려 155m 정도로 장안(長安)의 중축선이었다. 황궁으로 이어진 주작대로 좌우로 108개의 고루거각(高樓巨閣)이 도열하듯 했다.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上京龍泉府)에도 장안을 본떠 주작대로를 만들었다. 지금 베이징의 가장 넓은 길 역시 주작대로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도나 주요 도시에는 형태가 다르고 연원도 다양하지만 그 나름의 주작대로가 만들어졌다. 파리의 샹젤리제, 워싱턴의 펜실베이니아 애비뉴, 뉴욕의 브로드웨이, 베를린의 운터 덴 린덴, 빈의 링 슈트라세가 그런 길이다.

서울의 주작대로는 세종로다. 조선시대에는 육조(六曹)거리로 불렸다. 이조·호조·예조·병조·형조·공조 등 6개 중앙관청이 있었기 때문이다. 해태 석상이 있어 ‘해태 앞’이라고도 했으며 ‘비각 앞’이라고도 일컬었다. 도읍을 계획한 정도전이 정궁인 경복궁을 영건하면서 중국의 전범을 본떠 주작대로를 건설했다. 정도전은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피하기 위해 이 길을 3.8도가량 동쪽으로 비틀어 배치했다고 한다.

그는 육조거리의 궐외각사(闕外各司)가 정연한, 아름다운 광경을 보고 ‘열서성공(列署星拱)’이라 읊기도 했다. 러시아 장교들이 쓴 ‘내가 본 조선, 조선인’도 100년 전의 이 거리를 미려하게 묘사했다. 일제(日帝)도 육조거리를 찬탄했다. ‘상록수’의 작가 심훈이 “광복의 그날이 오면 한없이 울고 뛰며 뒹굴겠다”고 한 곳도 육조거리다.

이 거리에 감동했던 일제는 노폭을 줄이고 이름도 ‘광화문통’으로 바꿔 버렸다. 광복 후 1946년 10월부터 세종로로 불렸다. 세종대왕의 탄생지가 이 곳에서 가까운 현재의 옥인동이었기 때문에 세종로라는 이름을 붙였다.

서울시가 세종로에 육조거리의 전통과 역사성을 되살린다는 소식이 반갑다. 육조거리의 재탄생은 청계천 복원에 버금가는 역사(役事)다. 대한민국과 서울을 대표하는 거리가 서양의 흉내를 버리고 다시 태어나면 시민의 휴식공간으로서는 물론 외국 관광객들에게도 환영받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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