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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 따뜻한 시장경제

입력 : 2007-12-21 18:01:17

차가운 학문으로 인식되는 경제학에서 ‘따뜻한 경제학’이라는 조어가 유행하기 시작한 데는 1998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르티아 센의 공이 지대하다. 아시아에서 첫번째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가 된 인도 출신의 센은 기아와 빈곤 문제에 초점을 맞춘 경제학의 틀을 확립하는 데 공헌했다. 노벨상금 전액을 인도와 방글라데시의 빈민들을 위한 자선단체 설립기금으로 쾌척해 학문적 소신을 실천에 옮기기도 했다. 그러자 일부 언론은 그의 학문을 ‘따뜻한 경제학’이라고 명명했다.

휴머니스트 의사 노먼 베순의 말도 ‘따뜻한 경제학’의 긴요성을 웅변한다. “부자들의 결핵이 있고, 가난한 사람들의 결핵이 있다. 부자들은 회복되지만 가난뱅이들은 그렇지 못하다. 경제학과 병리학은 이처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경제학은 원래 따뜻한 학문이었다는 주장이 없지 않다. 하지만 “이론적인 편의를 위해 정형화된 ‘경제인(homo oeconomicus)’이 경제적 풍요를 대부분 독과점하면서 경제학은 사막처럼 메말라가고 있다”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인간의 얼굴이 아닌 숫자만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경제참모들은 새 정부의 경제정책이 ‘따뜻한 시장경제’에 초점이 맞춰질 것이라고 역설한다. 경쟁적 시장에 바탕을 두지만, 경쟁이 힘겨운 계층은 정부가 나서서 적극 보듬음으로써 ‘따뜻한 시장경제’가 성공적으로 정착할 것이라는 설명이다.

‘따뜻한 경제학’을 원용한 ‘따뜻한 시장경제’가 처음 나온 용어는 아니다. 외환위기 극복이 당면과제였던 김대중 정부는 2000년 경제운용계획을 발표하면서 ‘따뜻한 시장경제’를 표방했다. 참여정부 들어서도 김근태 전 열린우리당 의장이 ‘따뜻한 시장경제를 위한 제3의 길’을 주창한 적이 있다. 이번 대선에서도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출마를 선언하면서 ‘따뜻한 경제’를 기치로 내걸었다. 최근 들어서는 최고경영자의 덕목에까지 ‘따뜻한 경영’이 등장할 정도로 따뜻함이 경제 화두의 하나로 자리잡았다.

역대 정부가 ‘따뜻한 시장경제’를 부르짖었지만 따뜻함은 사실상 괄호 안에만 머물렀던 것이나 다름없다. 양극화의 심화가 곧바로 증언한다. 비정한 ‘시장’과 ‘따뜻함’의 쉽지 않은 결합이 새 정부에서도 수사(修辭)에 머물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타산지석의 슬기와 실천의지가 관건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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