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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흔적 지우기

입력 : 2008-01-04 18:26:10

불가나 도가에선 흔적을 남기는 걸 달갑게 여기지 않는다. 노자는 ‘도덕경’ 도편에서 ‘선행무철적(善行無轍迹)’을 권면한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게 잘 가는 것’이라는 뜻이다. 성철 스님 역시 어떤 흔적도 남기려 애쓰지 말라고 설법했다. 모든 건 이 순간이 지나고 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것일 뿐이라며. 조각 마음의 티끌 같은 흔적이라도 흘리지 말라는 경구다. 흔적은 집착에서 생긴다고 한다. 집착은 분별심에서 비롯된다. 분별이 집착을 낳고, 집착은 흔적을 낳는 셈이다.

이같은 성현들의 충언은 속인들이 흔적 남기기에 애달캐달한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인생이 곧 흔적이다. 태어나는 것 자체가 흔적이고, 살아가는 것도 흔적이다. 사랑도 이별도 흔적이다. 죽음조차 흔적이다.

미학에서는 화장한 얼굴이 맨얼굴의 흔적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편다. 또 화장이 흔적 지우기의 반복이라고도 한다. 그 흔적이 지워지고 조금이라도 더 아름다워지길 갈구해 화장한 얼굴은 또다시 욕망의 얼굴로 바뀌기 때문이다. 거듭되는 화장을 통해 그 때마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처럼 느끼게 마련이다. 하지만 새로운 피부와 화장한 얼굴은 새 흔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늘 일시적일 수밖에 없다. 성형외과를 찾는 대부분의 여성이 예쁜 얼굴로 변신하기보다는 세월의 흔적을 지우기 위해서라는 통계도 시사하는 바가 많다.

정치인들이야말로 화장과 흔적 지우기의 고수다. 맨얼굴로는 선거에서 쓴잔을 들기 십상이라는 강박감 탓이다. 지난 대선 때부터 열린우리당 이름과 노무현 대통령 흔적 지우기에 본격적으로 나섰던 대통합민주신당 사람들이 4월 총선을 앞두고 한층 고강도의 흔적 지우기에 여념이 없다고 한다.

대통합민주신당 의원들이 새해 들어 펴낸 의정보고서에서 노대통령과 참여정부의 흔적 지우기가 역력하게 드러난다. 노대통령과 가까웠던 한 중진의원의 의정보고서에는 대통령과 참여정부를 상징하는 사진이나 설명은 아예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일부 의원들의 의정보고서에는 당 로고마저 자취를 감췄다. ‘참여정부 심판론’이 대선 참패의 주범이라는 분석이 고스란히 투영된 듯하다. 끊임없는 화장으로 흔적이 묻힐지 의구심이 들면서 이욕에 붙좇는 씁쓸한 염량세태까지 더불어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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