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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숭례문 잔해

입력 : 2008-02-15 17:51:06수정 : 2008-02-15 17:51:11

아프가니스탄이 자랑하는 세계 최대의 ‘바미안 석불’이 탈레반 군사정권에 의해 파괴된 직후 인근 주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그 잔해를 한두개씩 주워갔다. 그러자 일부 관광객들도 기념품으로 삼겠다며 가방에 챙겨 넣었다. 아프가니스탄에 인접한 파키스탄 페샤와르에는 트럭 여러대분의 석불 파편이 매물로 나오기도 했다. 문화재를 거래하는 상인들에게 매입 제의가 왔다는 소문까지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남태평양 조그만 섬나라인 팔라우공화국은 흔히들 문화재라고 여기지도 않는 하찮은 근세 유물조차 소중하게 보존하는 것으로 이름 나 있다. 이 섬나라는 일본이 태평양전쟁 동안 남긴 군 병영시설과 전투기 잔해 등을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다. 폐허가 된 제철공장에서 나뒹굴고 있는 일본군의 기린맥주병 하나도 섣불리 옮겨놓지 못하게 법제화했다. 국민들이 이 규정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잔해는 어엿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팔라우처럼 태평양전쟁의 잔해가 많이 남아있는 사이판엘 가면 잔해 주위를 청소하고 있는 일본 사람들이 어렵잖게 눈에 띈다. 다른 나라에 있는 자국 문화재를 청소하는 걸 당연하게 여기는 일본인들이니 이런 곳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1949년 참혹한 화재로 타버린 호류지(法隆寺) 금당의 잔해를 정성스레 수거해 온존시키고 있는 일본이고 보면 이런 광경이 그리 놀랍지도 않다. 일본 정부는 불에 탄 금당의 기둥과 벽화까지 국보로 지정해 수장고에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불에 타 무너져 내린 숭례문의 잔해는 벌써부터 쓰레기 취급을 당해 가뜩이나 분노해 있는 국민의 원성이 자자하다. 소방당국이 굴착기로 화재현장을 파헤치는 장면도 목격됐다. 네티즌의 반응은 여간 무섭지 않다. “이참에 문화재청도 없어져야 하지 않을까. 있으나마나 정도를 넘어서니 말이다.”

비난 여론이 벌떼처럼 일자 문화재청이 폐기와 파쇄를 전격 중단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문화재청의 인식이 고작 이 정도이니 다른 정부기관의 안목이야 더 말할 게 있겠는가. 하필이면 아프가니스탄과 흡사한 수준을 떠올리게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평범한 한마디가 오늘처럼 절절한 때가 없는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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