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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중앙은행 총재

입력 : 2008-01-25 18:01:33

혁명의 풍운아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가 쿠바 중앙은행 총재로 일한 것은 한 편의 소극(笑劇)이다. 의사 출신인 그가 중앙은행 총재가 되는 과정에는 웃지 못할 일화가 있다. 피델 카스트로가 어느 날 회의 도중 이렇게 물었다. “여러분 중에 경제학자(economist)가 있는가?” 그러자 게바라가 손을 번쩍 들었다. 카스트로는 “자네가 경제학자였어?” 하고 되물었다. 잘못 알아들은 걸 알아차린 게바라는 “공산주의자(communist)가 있느냐고 묻는 줄 알았다”며 머쓱해 했다.

하지만 게바라는 쿠바 중앙은행 총재로 임명되고 말았다. 그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자기 월급을 5000페소에서 1200페소로 깎는 것이었다. 밤을 지새우며 부지런히 일했으나 그의 경제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음은 물론이다.

중앙은행 총재의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는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의 역할에서 선연히 드러난다. 파이낸셜 타임스가 지난해 ‘올해의 인물’로 장 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선정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가 신용위기에 신속하게 대처한 데다 유로화 지위를 격상시킨 공로를 높이 산 것이다. 트리셰 총재는 출범 10년도 안돼 애송이 취급을 받던 ECB를 FRB와 잉글랜드은행((BOE) 같은 전통있는 중앙은행들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영국은 지폐 최고액권인 50파운드의 뒷면에 잉글랜드은행 초대 총재인 존 호블런(1632~1712)의 초상을 담아 중앙은행의 권능을 과시한다. 세계 최초의 중앙은행임을 자랑하는 스웨덴의 스베리어릭스은행은 1968년 창설 300주년을 기념해 노벨경제학상을 만들 정도였다.

권위의 상징인 세계 주요국가의 중앙은행 총재들이 최근 들어 국제 금융위기 등으로 말미암아 수난을 겪고 있다고 한다. 벤 버냉키 FRB 의장, 머빈 킹 BOE 총재는 더 말할 나위 없고, 시를 좋아해 ‘프랑스에서 가장 우아한 공직자’란 별명까지 얻었던 트리셰 ECB 총재마저 도마에 올랐다. 최근 다보스포럼 발언으로 유럽 증시상황이 불투명해졌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도 차기 정부 조직개편으로 한국은행 총재의 입지가 위축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공교로운 우연의 일치인가.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법이고, 나무가 조용히 있고 싶어도 바람이 내버려 두지 않는 것과 같은 범상한 이치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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