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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여류기사 9단

입력 : 2008-01-18 17:53:48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의 당위성을 홍보하면서 유홍준 문화재청장이 한국과 일본 바둑계의 자세를 실례로 든 것은 타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그럴 듯해 보였다. 중국의 루이나이웨이 9단을 받아들인 한국은 이제 세계 여성 바둑계도 호령하고 있는 반면 반대 여론에 밀린 일본은 여전히 침체 국면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루이는 35세에 세계 역사상 처음으로 여류기사 9단이라는 입신의 경지에 오른 불세출의 철녀(鐵女)이다.

한 국제대회에서 ‘일본 남자 기사들 방에 들어가지 말라’는 훈령을 어긴 루이는 중국 국수전 출전정지라는 무거운 처벌을 받고 고심 끝에 바둑 유학을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다. 루이는 일본기원 소속으로 기사 생활을 하고 싶었지만 일본 바둑계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자 9단도 너끈히 이기는 철녀 루이가 들어오면 가뜩이나 위축된 일본 여류 바둑이 죽어버릴 수 있다는 게 이유였다.

한국은 달랐다. 루이와 평소 가깝게 지내던 영화 ‘올인’의 실제 주인공 차민수 5단이 한국기원의 객원기사로 초청하는 일에 발벗고 나섰다. 초기엔 물론 일본에서와 꼭같은 논란이 일었다. 하지만 젊은 여류기사들이 도리어 발벗고 나섰다. “우리가 루이 9단을 스파링 상대로 삼아 실력을 배양하면 되지 않느냐”며 남자 선배들을 설득했다. 그 대열에는 박지은도 끼여 있었다.

우려대로 처음엔 루이가 한국 바둑계를 휩쓸었다. 하지만 기가 죽지 않은 동기생 쌍두마차 조혜연, 박지은 등이 루이와 어깨를 겨루기에 이르렀다. 루이를 받아들여, 루이를 뛰어넘은 것이다. 루이를 꺾은 것은 조혜연이 먼저다. 조혜연은 7단 승단도 박지은보다 7개월 앞섰다.

그렇지만 박지은은 세계여성바둑대회인 대리배에서 우승해 조혜연을 뒤로하고 먼저 8단에 올랐다. 그는 엊그제 마침내 제1회 원앙부동산배 세계여자바둑선수권대회에서 루이를 꺾고 정상에 등극해 규정에 따라 여류기사로서는 한국 최초로 ‘입신(入神)’했다. 세계에서 세번째 여성 9단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기록적인 승단 속도다. 지금껏 여성 기사 9단은 루이와 평윈 단 두명의 중국인뿐이었다.

솔직하고 꾸밈없는 외모의 ‘미소 천사’ 같은 이미지에다 ‘여전사’란 별명까지 얻은 박지은. 그의 쾌거는 또 하나의 분야에서 떨친 한국 여성의 위용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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