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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원시성이 왜 야만인가’ 유럽이 길들인 태평양의 섬들

입력 : 2008-07-11 18:06:51수정 : 2008-07-11 18:07:04

ㆍ서구가 뿌린 질병·세금·강제노동… 무너진 전통적 가치 생생히 증언

적도의 침묵
주강현 | 김영사

현장을 중시한 레비스트로스의 1954년 답사노트.

섬이 많다고 해서 폴리네시아, 피부가 검은 사람들이 산다하여 멜라네시아, 작은 섬들이 모였다고 해서 미크로네시아. 유럽인들은 적도 태평양의 망망대해 떠 있는 섬 지역에 참 쉽게도 이름을 갖다 붙였다. 하와이 제도, 투발루, 사모아, 통가 등을 폴리네시아로 통칭한다. 파푸아 뉴기니, 솔로몬, 바누아투, 피지, 누벨칼레도니 등은 멜라네시아로 묶어 부른다. 마리아나 제도, 팔라우, 마셜, 나우루, 키리바시 서쪽 지역 등은 미크로네시아라고 뭉뚱그렸다. 같은 폴리네시아도 프랑스 영역은 프렌치 폴리네시아, 사모아도 미국령 사모아가 달리 존재한다. 이렇듯 속칭 남양군도의 이름과 문화권 분류는 순전히 서구의 작품이다. 원주민들이 쓰던 고유 명칭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태평양이란 이름부터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눈에 그냥 평화로워 보여 붙여진 것이니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천혜의 파라다이스’에 이처럼 식민주의의 딱지가 붙여져도 원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리얼리티로 받아들이고 만다. 그 뿐인가. 문화의 원형질은 산산조각처럼 부서졌다. 정체성 없는 서구화의 길을 걷는 것은 유럽인의 도래 이후 태평양의 섬들이 이미 겪었거나 여전히 겪고 있는 가슴아린 현실이다. 이곳의 국제정치적 위상은 1880년대 일본의 다케코시 요사부로가 했던 말에서 단적으로 읽힌다. “적도를 지배하는 자, 세계를 지배한다.” 이곳에는 유감스럽게도 한민족의 애달픈 이민사와 일본 군국주의의 강제동원 망령이 처연하게 서려 있다.

민속학자이자 해양문화학자인 주강현은 한민족의 역사와 무관하지 않은 적도 태평양의 여러 섬나라를 탐사하면서 고증한 결과물을 ‘적도의 침묵’이란 책으로 벼려냈다. 그는 제국주의적 관점에서 철저히 벗어나 피해자의 슬픈 역사와 문화, 현실을 추적해 들어간다. 유럽인의 식민주의 시각이나 원주민의 민족주의 관점만도 아닌, 제3의 시선으로 적도 태평양을 응시한다. 수많은 전문가들의 연구성과를 토양으로 삼았지만 뒤집어보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1800년대 초반 독일인이 그린 태평양의 다양한 인종들.


지은이는 이곳 문화와 사람들을 ‘원시성’으로 세련되게 포장하면서 야만적이라고 깔보는 서구적 시각을 시종일관 비틀어버린다. 언어학자이자 인류학자인 에드워드 사피어가 “원시적인 민족과 언어에 대한 관념은 모두 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고 했듯이. 저자는 프랑스 유수의 철학자를 금과옥조로 칭송하는 한국의 학자들이 정작 프랑스가 태평양에서 자행한 억압과 착취, 문명화란 이름으로 내디뎠던 야만적 행로에 관해서는 꿀 먹은 벙어리라고 한방 먹인다.

태평양 원주민의 역사가 한결같이 선사(Prehistory)로 치부되지만 여기서 ‘선사’란 고대 이전의 역사가 아니라 ‘유럽인 도래 이전의 모든 역사’를 의미하는 사실도 꼬집는다. 서구인들에게 이곳의 선사 시대는 고고학적 차원에서 ‘문자 없는 시대’가 아니라 ‘아직 유럽문자를 쓰지 않던 시대’를 의미할 뿐이며, 역사시대란 것도 ‘유럽문자가 들어와서 유럽인들에 의한 기록이 가능해진 시대’를 뜻한다. 지금까지 태평양의 역사와 문화를 서술하는 어떤 책도 단 2개의 시기 범주만 설정할 뿐이라는 것이다.

역사뿐만 아니라 생물학도 마찬가지다. 유럽인 도래 이전에 이루어졌던 생물식민지화와 유럽인 진출 이후에 이루어졌던 생물식민지화의 이분법이 그것이다. 식민통치에 저항한 전사들의 역사와 무덤도 존재하지만, 가해자인 유럽과 일본인 병사들의 추모기념비와 기록만 남아 있을 뿐 독립운동사는 서양의 어느 책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다고 일갈한다.

책은 외래인들이 기독교와 질병, 세금과 강제노동을 가져온 자리에 원주민의 절멸과 고귀한 전통적 가치들이 사라지는 과정을 생생하게 증언한다. 100만명이던 하와이 인구가 1890년에는 4만명에도 못 미치는 비극을 초래한 것은 제임스 쿡 선장과 선원들로부터 전염된 치유 불가능한 온갖 질병들 때문이었다. 천연두, 성병, 홍역, 유행성 이하선염, 독감 등이 하와이 인구를 감소시켰듯이 모든 적도 태평양 군도의 인구도 그렇게 한순간에 격감했다.

핵실험과 군사기지의 설치로 삶의 터전을 빼앗긴 비키니 섬과 차고스 제도 원주민들의 운명, 값비싼 고래기름 때문에 향유고래의 씨를 말리다시피한 미국 포경선들의 무자비성도 도마에 올렸다.

선진국들의 공업화로 인한 지구온난화 피해를 가장 치명적으로 입는 곳도 이 지역임을 빼놓지 않고 상기시킨다. 이산화탄소 과대배출의 주범이 미국, 유럽, 일본 등 선진국임에도 애꿎게 투발루 같은 태평양 섬나라가 물에 잠길 위기에 처하게 됐으니 말이다.

모계사회 전통과 토지공유제 같은 고유의 사회질서가 무너지는 과정도 유럽이 강요한 자본주의 바람 때문이라는 점도 현장감 있게 들려준다. 현지 여성과 결혼해 정착한 한국인의 애환, 일제 때 징병이나 징용으로 끌려온, 이름모를 우리의 선조가 씨를 뿌려 해마다 피고 지는 게 틀림없는 봉숭아꽃의 애잔한 사연들도 감칠맛을 더해준다.

이 책은 해양민족지(Maritime Ethnography)에 속하지만 여행기와 민족지 중간쯤 되는 느낌을 받게 한다. 한국 심해 탐사대와 함께 한 탐방이어서 마치 비디오를 보는 듯 사실적인 소묘도 적지 않다. 530여장에 이르는 사진, 그림, 지도가 곁들여져 있으니 한결 그렇다. 대부분의 전작이 그랬듯이 저자 스스로 ‘현장, 바로 그곳’에 기초한 글임을 무척 강조한다. 민족지학자 이전에 ‘철저한 아키비스트(기록관리사)’라는 평가를 뿌듯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그 때문이다. 3만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