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6-13 17:35:19ㅣ수정 : 2008-06-13 17:35:24
▲저항의 인문학…에드워드 W 사이드 | 마티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아다. 좀더 성숙한 사람은 모든 곳을 고향처럼 느끼는 코스모폴리턴이며, 궁극의 성숙한 모습은 모든 곳을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이방인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인 문예비평가이자 사상가인 에드워드 W 사이드가 이따금 인용하던 12세기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1096~1141)의 명구다.
비서구문화권에서 자란 뒤 40년간 미국 땅에 거주하면서도 평생 고향을 두지 못한 것이나 다름없는 경계인(境界人)으로 살았던 사이드에겐 더없이 매력적으로 다가온 구절이었음에 틀림없다. 영국 왕세자의 이름을 딴 ‘에드워드’와 아랍 성인 ‘사이드’를 혼합한 이름을 태어나면서부터 지녔던 게 그에겐 운명의 예고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의 대표작 ‘오리엔탈리즘’의 탄생은 이런 필연의 바탕을 배태하고 있었던 것 같다.
등록상표처럼 된 ‘오리엔탈리즘’과 그의 실천성 때문에 마치 사회과학자처럼 느껴지는 착각이 들 때도 적지 않지만 사이드는 오롯이 인문학자로 살았다. 그것도 ‘치열한 실천인으로서의 인문주의자’였다.
도서출판 마티가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의 두번째 책으로 펴낸 ‘저항의 인문학(원제 Humanism and Democratic Criticism)’은 사이드의 인문학 정신을 체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사이드의 컬럼비아대 철학과 동료 교수이자 헤이먼 인문학연구소장인 아킬 빌그라미가 “인문주의는 아마도 사이드가 타협 없는 이상을 품고서 받아들인 유일한 주의(ism)일 것”이라고 한 서문이 이를 한 마디로 대변한다. ‘저항의 인문학’은 지병인 백혈병 말기에 접어들어 힘겨운 투병 중에도 컬럼비아대와 영국 케임브리지대를 오가며 행한 강연을 토대로 완성한 책이다. 그가 생전에 마무리한 마지막 저서이기도 하다.
사이드에게 인문주의는 곧 비판정신이었다. 인문주의는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이며 모든 종류의 진부함과 부주의한 언어에 반대한다는 그 나름의 규준이 웅변한다.
그는 인문학자가 이 세계를 정치인들에게 위임하고 텍스트로 돌아가라는 목소리를 과감하게 차버린다. 늘 실천을 부르짖는 그는 인문주의의 실천과 시민 참여의 실천 사이에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강조한다. “인문주의는 철회나 배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인문주의의 목적은 해방과 계몽에 쏟은 인간 노동과 에너지의 산물들, 더 중요하게는 집합적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인간의 오독이나 오해 등을 비판적 검토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인문주의의 이름으로 인문주의에 비판적일 수 있다는 열린 자세를 중시한다. 인문주의는 드러냄의 형태여야지 비밀이나 종교적 계시 형태여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다.
그는 심지어 애국적으로 국가를 ‘긍정’하거나 비애국적으로 국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주저없이 의문을 던지는 역할을 택하겠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사이드는 인문학의 범주를 제한하는 것에도 단호히 반대한다. 얼핏 사회과학 영역으로 여겨지는 이슈도 인문학이 관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일어난 반세계화 시위사건이나 미국 의료시스템 폭동과 같은 문제도 당연히 인문학이 다루어야 하는 과제로 불러들인다. 미국의 대학들이 대기업화되고, 인문학보다 변호, 의학, 생명기술, 기업적 관심사 같은 재정에 도움이 되는 자연과학 프로젝트에 더 몰두하고 있는 조류도 강한 어조로 꼬집는다.
일관된 서구중심주의 반대 입장은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여성학과 젠더, 역사와 노동,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고 서구의 고전만 진정한 인문학으로 취급하는 미국 신인문주의자들의 행태에 회초리를 들이댄다. 왜곡과 편견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채찍이 이 책에도 어김없이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끊임없는 자기이해와 자기실현의 과정임을, 그리고 이것이 백인, 남성, 유럽인이자 미국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인문주의의 본질임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실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셈입니다. 지구상에는 또 다른 지적 전통이 있고 또 다른 문화가 있으며 특유의 신들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문명의 역사가 야만의 역사”라는 발터 벤야민의 언명을 인문주의자들이 잊지 말라고 각별히 부탁한다. 새뮤얼 헌팅턴으로 대표되는 문명의 충돌이니 문화의 갈등이니 하는 얘기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당부인 셈이다.
사이드는 인문학적 실천을 위해 ‘문헌학으로의 회귀’를 무척이나 강조한다. 낱말의 명확한 의미나 어원 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용과 저항의 인문학을 위한 방법론으로서의 문헌학을 뜻한다. 그래서 사이드의 인문주의는 언어에 대한 헌신이기도 하다.
사이드의 마무리 말은 그가 좋아하던 후고의 명구를 상기시켜 주는 듯하다. “지식인이 임시로 거하는 집은 유감스럽게도 그 안에서 누구도 후퇴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긴급하고 저항적이며 비타협적인 예술의 영역이라는 생각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평생 정착할 고향을 두지 못했던 사이드가 ‘임시적으로 거한 곳’은 예술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결어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1권으로 본격적인 비평서이자 유고작인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지난 1월에 펴낸 마티는 앞으로 ‘권력, 정치 그리고 문화’ ‘시작: 의도와 방법’ ‘망명에 관한 숙고’를 차례로 출간할 예정이어서 기대해 봄직하다. 김정하 옮김. 1만5000원
“자신의 고향을 달콤하게 여기는 사람은 아직 주둥이가 노란 미숙아다. 좀더 성숙한 사람은 모든 곳을 고향처럼 느끼는 코스모폴리턴이며, 궁극의 성숙한 모습은 모든 곳을 타향이라고 생각하는 이방인이다.” 팔레스타인 출신의 세계적인 문예비평가이자 사상가인 에드워드 W 사이드가 이따금 인용하던 12세기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1096~1141)의 명구다.
등록상표처럼 된 ‘오리엔탈리즘’과 그의 실천성 때문에 마치 사회과학자처럼 느껴지는 착각이 들 때도 적지 않지만 사이드는 오롯이 인문학자로 살았다. 그것도 ‘치열한 실천인으로서의 인문주의자’였다.
사이드에게 인문주의는 곧 비판정신이었다. 인문주의는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이며 모든 종류의 진부함과 부주의한 언어에 반대한다는 그 나름의 규준이 웅변한다.
그는 인문학자가 이 세계를 정치인들에게 위임하고 텍스트로 돌아가라는 목소리를 과감하게 차버린다. 늘 실천을 부르짖는 그는 인문주의의 실천과 시민 참여의 실천 사이에 모순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이렇게 강조한다. “인문주의는 철회나 배제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이지요. 인문주의의 목적은 해방과 계몽에 쏟은 인간 노동과 에너지의 산물들, 더 중요하게는 집합적 과거와 현재에 대한 인간의 오독이나 오해 등을 비판적 검토의 대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는 인문주의의 이름으로 인문주의에 비판적일 수 있다는 열린 자세를 중시한다. 인문주의는 드러냄의 형태여야지 비밀이나 종교적 계시 형태여서는 안 된다고 경계한다.
에드워드 사이드에게 인문주의는 고정관념에 대한 저항이자 시민 참여의 실천이었다. 사진은 ‘68 혁명’ 당시 프랑스 파리 생제르멩 거리에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고 있는 학생들(ⓒ Bruno Barbey). 왼쪽 위 사진은 2000년 7월3일 레바논·이스라엘 국경에서 이스라엘 측으로 돌을 던지는 사이드의 모습.
그는 심지어 애국적으로 국가를 ‘긍정’하거나 비애국적으로 국가에 대해 ‘의문’을 던지거나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주저없이 의문을 던지는 역할을 택하겠다고 선언했을 정도다.
사이드는 인문학의 범주를 제한하는 것에도 단호히 반대한다. 얼핏 사회과학 영역으로 여겨지는 이슈도 인문학이 관여해야 한다는 주장을 편다. 1999년 11월 시애틀에서 일어난 반세계화 시위사건이나 미국 의료시스템 폭동과 같은 문제도 당연히 인문학이 다루어야 하는 과제로 불러들인다. 미국의 대학들이 대기업화되고, 인문학보다 변호, 의학, 생명기술, 기업적 관심사 같은 재정에 도움이 되는 자연과학 프로젝트에 더 몰두하고 있는 조류도 강한 어조로 꼬집는다.
일관된 서구중심주의 반대 입장은 이 책에서도 여지없이 드러난다. 여성학과 젠더, 역사와 노동, 아시아·아프리카 문학의 존재를 애써 외면하고 서구의 고전만 진정한 인문학으로 취급하는 미국 신인문주의자들의 행태에 회초리를 들이댄다. 왜곡과 편견의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채찍이 이 책에도 어김없이 등장한 것이다.
“인간의 역사가 끊임없는 자기이해와 자기실현의 과정임을, 그리고 이것이 백인, 남성, 유럽인이자 미국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 인문주의의 본질임을 인식하지 않는다면 실로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셈입니다. 지구상에는 또 다른 지적 전통이 있고 또 다른 문화가 있으며 특유의 신들이 있습니다.” 그는 “모든 문명의 역사가 야만의 역사”라는 발터 벤야민의 언명을 인문주의자들이 잊지 말라고 각별히 부탁한다. 새뮤얼 헌팅턴으로 대표되는 문명의 충돌이니 문화의 갈등이니 하는 얘기에 귀 기울이지 말라는 당부인 셈이다.
사이드는 인문학적 실천을 위해 ‘문헌학으로의 회귀’를 무척이나 강조한다. 낱말의 명확한 의미나 어원 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수용과 저항의 인문학을 위한 방법론으로서의 문헌학을 뜻한다. 그래서 사이드의 인문주의는 언어에 대한 헌신이기도 하다.
사이드의 마무리 말은 그가 좋아하던 후고의 명구를 상기시켜 주는 듯하다. “지식인이 임시로 거하는 집은 유감스럽게도 그 안에서 누구도 후퇴하거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긴급하고 저항적이며 비타협적인 예술의 영역이라는 생각으로 끝을 맺겠습니다.” 평생 정착할 고향을 두지 못했던 사이드가 ‘임시적으로 거한 곳’은 예술이었던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결어이다.
에드워드 사이드 선집 1권으로 본격적인 비평서이자 유고작인 ‘말년의 양식에 관하여’를 지난 1월에 펴낸 마티는 앞으로 ‘권력, 정치 그리고 문화’ ‘시작: 의도와 방법’ ‘망명에 관한 숙고’를 차례로 출간할 예정이어서 기대해 봄직하다. 김정하 옮김. 1만5000원
'책과 삶-북리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책과 삶]‘원시성이 왜 야만인가’ 유럽이 길들인 태평양의 섬들 (0) | 2008.07.11 |
---|---|
[책과 삶]그들의 60년속에 ‘미래의 대안’이 숨어있다 (1) | 2008.06.27 |
[책과 삶]진화하는 지식과 학문 ‘대중언어’로 소통하다 (1) | 2008.05.30 |
[책과 삶]‘밥상위의 毒소’ 광우병 뿐이랴 (2) | 2008.05.16 |
[책과 삶]비만, 우울증도 죄다? (0) | 2008.05.0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