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력 : 2008-08-08 17:27:30ㅣ수정 : 2008-08-08 17:27:43
▲일본의 재구성…패트릭 스미스 | 마티
“처음에 이 책을 집어들 때는 서양인이 일본에 관해 그저 그런 책을 또 한권 썼겠거니 했는데 막상 읽다보니, 이전부터 나도 모르게 생각은 하고 있었으되 미처 또렷하게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짚어주는 게 아닌가.”
지은이가 한국 독자들에게 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일본 독자가 남긴 말을 인용한 대목이 이 책의 개괄적인 인상을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듯하다. ‘일본의 재구성’(원제 Japan: A Reinterpretation)은 10년 전 미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간된 ‘전후 일본 개설서’이지만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큼 탁견으로 교직됐다. 저자 패트릭 스미스는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도쿄지국장으로 일하는 등 20년 이상 아시아 지역에서 활약 중인 베테랑 언론인이다.
가장 먼저 눈길을 잡는 것은 일본의 근대화와 근대성의 상관관계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근대화를 선점했으나 근대성 확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지은이는 근대화가 기술발전, 공업화 등 물질적인 발전을 의미한다면, 근대성은 심리와 의식의 측면으로서 개인이 자주성을 지킬 능력이 있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분별한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시도할 때 궁극적 목적이 다름 아닌 전통적인 ‘일본정신’을 보존하기 위함이었고, 그 과정에서 근대성이 왜곡되고 말았다고 저자는 핵심을 집어낸다.
지은이는 일본이 오늘날 독일과 달리 과거사 문제로 이웃 나라들과 불편한 관계를 지속하고 있는 것은 미국의 잘못된 전후 처리과정에서 비롯됐음을 조목조목 파고든다. 이 문제는 일본 연구자들이라면 거의 빼놓지 않고 지적하는 부분이지만 치밀한 문헌분석과 통찰력을 동원해 사뭇 도발적으로 비판한다. 실패한 일본식 민주주의는 냉전만 의식해 극우세력과 심지어 전범에 해당하는 군국주의자들에게 정권을 맡긴 맥아더 사령부의 잘못 끼운 첫 단추 때문임을 신랄하게 추궁한다. 개혁 대상이 개혁의 칼자루를 쥐게 된 모순 현상을 저자는 ‘역(逆)코스’라고 이름 지었다.
그는 특히 하버드대 출신의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를 필두로 한 이른바 ‘국화회’ 학자들이 일본을 무비판적으로 옹호하고 지적 궤변으로 미국 전체를 오도한 사실을 준엄하게 다그친다. 이 때문에 미국은 그릇된 일본을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사실도 잊고 지낸다고 꾸짖는다.
저자는 또 일본이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불행이야말로 당면한 문제점의 본질이라고 맥을 짚는다. 의식적으로 망각하거나 숨겨진 역사, 과도하게 분칠한 과거가 개개인의 정체성을 근원적으로 정립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정치·경제는 물론 교육, 직장, 도시와 시골, 문화와 민족정체성, 성차별, 과거사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분야에 걸쳐 날카로운 투시력을 보여준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역작 ‘국화와 칼’과 다른 차원이지만 다양한 문학작품, 미술, 연극, 음악, 만화 등 문화적 분석 도구도 곁들여 감흥과 소구력을 보탠다. 저자는 일본의 문화를 소수 식자층 엘리트로 이어지는 대전통(大傳統)과 다수 대중의 소전통(小傳統)으로 구별지어 도입부부터 끝까지 일관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읽다보면 마치 거울을 통해 한국의 얼굴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국 사회와 빼닮은 꼴이 수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밝은 면보다 응달진 곳이 더욱 그렇다. 조기교육 바람, 과외 학원, 주입식 학습방법, 모의고사, 학교 폭력과 집단따돌림, 학부모·교사들의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판에 박은 듯한 교육의 모습 그대로다. 그뿐 아니다. 효용가치가 낮은 도로 건설, 수도권과 지방의 이분법적 국토개조사업 등으로 건설업자들의 배만 불려주는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행태, 기업의 군대식 신입사원 교육, 선심성 정부보조금으로 굴러가는 농어촌 정책도 정치인과 지역·기업 이름만 바꾸면 될 법하다.
일본의 또 다른 그늘인 ‘그들 안의 타자(他者)’도 비중 있게 파고든다. 으뜸관심사는 단연 재일 한국인이다. 여기에다 전통적인 최하층계급인 피차별 부락민, 오키나와인, 아이누족,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직접 인터뷰를 통해 기피증과 차별상을 부각시킨다.
책은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적절한 혼융과 더불어 핵심을 꿰뚫는 관점이 미덕을 발휘하고 있다. 남다른 정보보다 새로운 시각이 담겼다는 편이 옳겠다. 저자의 취재, 개인적인 관찰과 정치·경제·문화·사회학 등을 아우르는 방대한 문헌연구가 뒷받침된 덕분인 것 같다. 역대 일본총리들을 비롯한 정치지도자, 기업인, 교육자, 학자, 작가 등 국제적인 지식인 취재망에다 갑남을녀들의 애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소리들이 증언의 호소력을 배가시킨다.
이미 국제적으로 정평이 난 만큼 대부분 고개가 끄덕여지는 콘텐츠가 담겨 있으나 한국 독자로서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에 대한 입장만은 동의하기 어렵다. 지은이는 전후 미국이 만들어준 평화헌법을 찢어버리고 스스로 정체성을 세운 뒤 경제규모에 걸맞은 국제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평화헌법 개정은 국제무대에서 무력사용을 가능케 하는 수준이어서 뼈저린 피해 역사를 체험한 한국을 비롯한 인근 국가들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는 아키히토 현 일왕의 시대 명칭을 ‘헤이세이(平成)’로 정한 정신과도 배치된다. 무력사용이 가능해지면 ‘평화를 이룬다’는 연호의 본뜻과 불가피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노시내 옮김 2만6000원
지은이가 한국 독자들에게 쓴 편지의 마지막 부분에 일본 독자가 남긴 말을 인용한 대목이 이 책의 개괄적인 인상을 함축적으로 담아내는 듯하다. ‘일본의 재구성’(원제 Japan: A Reinterpretation)은 10년 전 미국과 일본에서 동시 출간된 ‘전후 일본 개설서’이지만 대부분 그대로 받아들여도 좋을 만큼 탁견으로 교직됐다. 저자 패트릭 스미스는 19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반까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도쿄지국장으로 일하는 등 20년 이상 아시아 지역에서 활약 중인 베테랑 언론인이다.
가장 먼저 눈길을 잡는 것은 일본의 근대화와 근대성의 상관관계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근대화를 선점했으나 근대성 확보에는 성공하지 못했다는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지은이는 근대화가 기술발전, 공업화 등 물질적인 발전을 의미한다면, 근대성은 심리와 의식의 측면으로서 개인이 자주성을 지킬 능력이 있는가에 관한 문제라고 분별한다. 일본이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근대화를 시도할 때 궁극적 목적이 다름 아닌 전통적인 ‘일본정신’을 보존하기 위함이었고, 그 과정에서 근대성이 왜곡되고 말았다고 저자는 핵심을 집어낸다.
일본의 대표적인 전통극 가부키의 배우(왼쪽)와 일본 도쿄의 신세대 거리인 하라주쿠의 젊은이.
그는 특히 하버드대 출신의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를 필두로 한 이른바 ‘국화회’ 학자들이 일본을 무비판적으로 옹호하고 지적 궤변으로 미국 전체를 오도한 사실을 준엄하게 다그친다. 이 때문에 미국은 그릇된 일본을 자신들이 만들었다는 사실도 잊고 지낸다고 꾸짖는다.
저자는 또 일본이 자신을 똑바로 보지 못하는 불행이야말로 당면한 문제점의 본질이라고 맥을 짚는다. 의식적으로 망각하거나 숨겨진 역사, 과도하게 분칠한 과거가 개개인의 정체성을 근원적으로 정립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이 책은 정치·경제는 물론 교육, 직장, 도시와 시골, 문화와 민족정체성, 성차별, 과거사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분야에 걸쳐 날카로운 투시력을 보여준다.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의 역작 ‘국화와 칼’과 다른 차원이지만 다양한 문학작품, 미술, 연극, 음악, 만화 등 문화적 분석 도구도 곁들여 감흥과 소구력을 보탠다. 저자는 일본의 문화를 소수 식자층 엘리트로 이어지는 대전통(大傳統)과 다수 대중의 소전통(小傳統)으로 구별지어 도입부부터 끝까지 일관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읽다보면 마치 거울을 통해 한국의 얼굴을 보는 듯한 착각이 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한국 사회와 빼닮은 꼴이 수없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밝은 면보다 응달진 곳이 더욱 그렇다. 조기교육 바람, 과외 학원, 주입식 학습방법, 모의고사, 학교 폭력과 집단따돌림, 학부모·교사들의 사고방식에 이르기까지 판에 박은 듯한 교육의 모습 그대로다. 그뿐 아니다. 효용가치가 낮은 도로 건설, 수도권과 지방의 이분법적 국토개조사업 등으로 건설업자들의 배만 불려주는 정치인들과 관료들의 행태, 기업의 군대식 신입사원 교육, 선심성 정부보조금으로 굴러가는 농어촌 정책도 정치인과 지역·기업 이름만 바꾸면 될 법하다.
일본의 또 다른 그늘인 ‘그들 안의 타자(他者)’도 비중 있게 파고든다. 으뜸관심사는 단연 재일 한국인이다. 여기에다 전통적인 최하층계급인 피차별 부락민, 오키나와인, 아이누족, 외국인 노동자들의 현실을 직접 인터뷰를 통해 기피증과 차별상을 부각시킨다.
책은 저널리즘과 아카데미즘의 적절한 혼융과 더불어 핵심을 꿰뚫는 관점이 미덕을 발휘하고 있다. 남다른 정보보다 새로운 시각이 담겼다는 편이 옳겠다. 저자의 취재, 개인적인 관찰과 정치·경제·문화·사회학 등을 아우르는 방대한 문헌연구가 뒷받침된 덕분인 것 같다. 역대 일본총리들을 비롯한 정치지도자, 기업인, 교육자, 학자, 작가 등 국제적인 지식인 취재망에다 갑남을녀들의 애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목소리들이 증언의 호소력을 배가시킨다.
이미 국제적으로 정평이 난 만큼 대부분 고개가 끄덕여지는 콘텐츠가 담겨 있으나 한국 독자로서 일본의 평화헌법 개정에 대한 입장만은 동의하기 어렵다. 지은이는 전후 미국이 만들어준 평화헌법을 찢어버리고 스스로 정체성을 세운 뒤 경제규모에 걸맞은 국제적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고 촉구한다. 평화헌법 개정은 국제무대에서 무력사용을 가능케 하는 수준이어서 뼈저린 피해 역사를 체험한 한국을 비롯한 인근 국가들은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는 아키히토 현 일왕의 시대 명칭을 ‘헤이세이(平成)’로 정한 정신과도 배치된다. 무력사용이 가능해지면 ‘평화를 이룬다’는 연호의 본뜻과 불가피하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노시내 옮김 2만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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