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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무너진 불패 신화

입력 : 2008-08-15 17:57:28수정 : 2008-08-15 17:57:38

‘영원한 것은 없다.’ ‘월가의 신화’로 불리다 한 달여 전 세상을 떠난 억만장자 존 템플턴경이 남긴 성공 투자를 위한 십계명 가운데 하나다.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일컫는 템플턴상을 제정한 그가 존경받는 이유도 그런 정신이 바탕에 깔려 있다.

‘결승선은 없다.’ 세계 스포츠계의 거물 ‘나이키’의 회사 표어다. 그리스 신화 ‘승리의 여신’ 니케를 따 작명한 이 회사의 표어는 ‘영원한 승자는 없고 새로운 승부만 존재한다’는 것을 표상한다.

승패는 언제나 교차되는 법이다. 병법의 달인 손자는 이를 ‘전승불복’(戰勝不復)이라는 사자성어로 표현한다. 전쟁에서 한 번 거둔 승리는 반복되는 게 아니라는 경구다. 손자병법은 승리가 영원하지 않다는 걸 오행(五行)의 순환에 비유하기도 한다. 오행무상승(五行無常勝). 쇠(金)는 불(火) 앞에서는 녹아버리고, 불도 물(水) 앞에서 승자의 자리를 내줘야 한다. 물은 다시 흙(土)에 흡수되고, 흙은 나무(木)에 고개를 숙인다. 나무는 쇠에 심약한 신세다.

‘영원한 승자는 없다’는 진리가 전쟁과 자연계뿐만 아니라 인생과 기업, 권력 세계를 비롯해 적용되지 않는 곳이 없는 불변의 법칙임을 누구나 시시때때로 절감한다. 부동의 세계 1위 선박 수주실적을 호령하는 한국 조선산업의 신화가 흔들리고 있다는 소식이 얼마전부터 들리기 시작했다.

‘무패 신화’를 써온 한국 여자양궁마저 예외는 아니었다.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아성이 베이징올림픽에서 중국의 장쥐안쥐안에게 무너졌다. 그러자 중국 언론들은 구시대가 끝나고 새로운 시대의 신화가 탄생했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한다. 일부 언론은 “모두들 한국 양궁의 신화를 얘기했지만 장쥐안쥐안은 그 신화가 단지 전설 속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을 증명했다”고 한 발 더 나갔다.

한국의 여궁사들과 감독은 선배들의 신화를 깨뜨려 송구스럽기 그지없다며 고개를 떨궜다. 하지만 미안해하거나 비난받아야 할 까닭은 조금도 없다. 그들은 누구보다 강인하고 과학적인 훈련을 받아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한 번 진 것에 불과하다. 더구나 단체전에서는 금메달을 따지 않았는가. 중국의 무례한 홈텃세도 탓하지 말아야 한다. 신화는 다시 쓸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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