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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키파’ 쓴 오바마

입력 : 2008-07-25 17:59:45수정 : 2008-07-25 17:59:47

고대 로마시대엔 머리를 가리는 것이 노예의 상징이었다. 머리를 가리지 않고 다닐 수 있는 자유인과 구별하기 위해서였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종’임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특유의 모자를 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신전 같은 성소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일컬어야 하는 예배 때만 썼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다가 오늘날처럼 평소에도 하늘에 머리를 보이지 않는 관습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예루살렘의 ‘통곡의 벽’이나 야드 바셈 홀로코스트 추모관 같은 성소를 방문하는 남자들은 유대 전통모자 ‘키파’를 반드시 써야 한다. 이스라엘을 방문하는 모든 국빈이 필수적으로 방문하는 야드 바셈 기념관에서는 예외가 있을 수 없다. 여행객도 마찬가지다. 외국관광객들을 위해서는 성소 입구에 종이 키파를 마련해 둔다. 관례를 모르고 입장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경비원이 다가와 키파 쓰기를 권한다. 이를 거부하면? 즉각 퇴장명령을 받는다. ‘통곡의 벽’의 경우 키파가 아니라도 최소한 어떤 모자든 쓰고 있어야 한다.

국빈이 외교적 갈등을 감수하면서 키파를 쓰지 않고 야드 바셈을 방문한 단 한번의 예외가 있긴 했다. 2005년 5월 레젭 타입 에르도간 터키 총리가 국빈 방문했을 때이다. 에르도간 총리는 모슬렘이어서 유대교 상징인 키파를 쓸 수 없다고 방문교섭 단계부터 버텼다. 에르도간은 키파를 쓰지 않고 야드 바셈을 방문한 유일한 국빈으로 기록됐다.

버락 오바마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가 엊그제 중동 순방 마지막 행선지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을 잇달아 방문하면서 강력한 친이스라엘 노선을 재확인했다. 언행도 그랬지만 이스라엘 35시간, 팔레스타인 1시간이라는 체류 일정이 한층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국빈 자격은 아니었지만 홀로코스트 추모관과 ‘통곡의 벽’을 찾은 자리에서 예의 키파를 쓴 사진이 한때 이슬람교도였다는 루머를 불식시키려 안간힘을 쓰던 모습과 겹쳐 떠오른다.

미국과 이스라엘의 특수관계를 감안하더라도 유대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지 않고선 대통령에 당선되기 어렵다는 현실적 이유가 더 클 것이다. 선거에는 도움이 되겠지만 평화에는 결코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꼬집은 영국 가디언지의 사설이 긴 여운을 남겨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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