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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적(餘滴)

[여적]보름달의 정취

입력 : 2008-09-12 16:58:50수정 : 2008-09-12 16:59:06

소설가 김동리만큼 보름달을 정감 있고 격조 높게 예찬하는 이도 드물 듯하다. 그는 수필 ‘보름달’에서 그믐달이나 초승달보다 보름달이 좋은 까닭을 조곤조곤 묘사한다.

‘새벽달보다는 초승달이 나에게는 한결 친할 수 있다.(중략) 그러나 그렇단들 초승달로 보름달을 겨룰 수 있으랴. 마침 어우러져 피어 있는 개나리, 복숭아, 벚꽃들이 아니라면, 그 연한 빛깔과 맑은 향기가 아니라면, 그 보드라운 숨결 같은 미풍이 아니라면, 초승달 혼자서야 무슨 그리 위력을 나타낼 수 있으랴.(중략) 보름달은 이와 달라 벚꽃, 살구꽃이 어우러진 봄밤이나, 녹음과 물로 덮인 여름밤이나, 만산에 수를 놓은 가을밤이나, 천지가 눈에 쌓인 겨울밤이나, 그 어느 때고 그 어디서고 거의 여건을 타지 않는다. 아무 것도 따로 마련된 것이 없어도 된다. 산이면 산, 들이면 들, 물이면 물, 수풀이면 수풀,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족하다. 산도 물도 수풀도 없는, 아무 것도 없는 사막이라도 좋다. 머리 위에 보름달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고 세상은 충분히 아름답고 황홀하고 슬프고 유감(有感)한 것이다. 보름달은 온밤 있어 또한 좋다. 초승달은 저녁에만, 그믐달은 새벽에만 잠깐씩 비치다 말지만, 보름달은 저녁부터 아침까지 우리로 하여금 온밤을 누릴 수 있게 한다. 이렇게 보름달은 온밤을 꽉 차게 지켜줄 뿐 아니라, 제 자신 한쪽 귀도 떨어지지 않고, 한쪽 모서리도 이울지 않은 꽉 찬 얼굴인 것이다.’

다성(茶聖) 초의선사는 보름달을 숫제 찻잔에 떠담는다. ‘어젯밤에 뜬 보름달은 참으로 빛났다/ 그 달을 떠서 찻잔에 담고/ 은하수 국자로 찻물을 떠/ 차 한 잔에 명상한다/ 뉘라서 참다운 차 맛을 알리요/ 달콤한 잎 우박과 싸우고/ 삼동(三冬)에도 청정한 흰 꽃은 서리를 맞아도/ 늦가을 경치를 빛나게 하나니/ 선경(仙境)에 사는 신선의 살빛같이도 깨끗하고/ 염부단금(閻浮檀金) 같이 향기롭고 아름다워라.’

이번 추석엔 구름이 낄 것이라는 예보가 있어 보름달을 보기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워낙 주말 날씨가 잘 틀리는 기상청인지라 은근히 기대해 보고 싶다. 표연히 홍진세계를 벗어나 보름달 중의 보름달이라는 한가위 보름달의 아취를 잠깐이라도 느끼며 각박한 세심을 달래고 소원도 빌어보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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