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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북리뷰

[책과 삶]이게 바로 ‘중국스타일’이다

입력 : 2008-10-31 17:56:33수정 : 2008-10-31 17:56:46

ㆍ중국인이면서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패션디자이너의 객관적 감각 보고서

중국풍
비비안 탐 | 한길사

‘중국적인 것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해답은 일도양단할 수 있을 만큼 단순명쾌하지 않다. 중국 문화가 독창성을 지녔으나 워낙 혼융(hybrid)인데다 안과 바깥에서 보는 중국 스타일은 서로 다른 모습으로 투영되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이다.

중국인이면서도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세계적인 패션 디자이너 비비안 탐의 눈에는 중국적인 것이 한층 복잡미묘하다.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칠해진 촌스럽고 화려한 탑 지붕, 호화로운 빨강과 빛나는 금색으로 장식된 중국 식당, 소용돌이 문양의 대리석으로 상감된 무겁고 어두운 색조의 조각 나무 가구, 문직으로 짜여진 만주 의상과 오렌지색으로 칠해진 긴 손톱, 향초에서 피어오르는 짙은 연기. 흔히 중국적인 것으로 여기는 이런 것들은 한결같이 청 왕조의 산물이다.

청 황실이야말로 서양의 새로운 스타일과 개념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유러피누아즈리(europinoiserie·중국에서 유럽 기풍이나 스타일로 만들어진 예술품)가 의외로 많다. 시누아즈리(chinoiserie·근대 유럽에서 성행한 중국적인 기풍이나 스타일로 만들어진 예술품)가 그렇듯이.

비비안 탐이 떠올리는 중국풍은 동양의 지혜와 서양 시너지의 결합인 경우가 적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시크’(chic)란 ‘수고스럽지 않은 편안함을 갖춘 스타일리시함’을 뜻하지만 ‘차이나 시크’는 영적인 것과 시각적인 것의 균형을 구체화한 훨씬 깊은 영역을 포괄한다.”

비비안 탐은 중국 광저우에서 태어나 홍콩에서 교육을 받으며 성장한 뒤 미국에서 활동 중이어서 중국 문화에 대한 통찰이 더욱 객관적이면서도 창발적이다. 그는 1970년대 후반과 80년대 초 중국 본토를 여행하면서 만연한 ‘레트로 패션’(과거의 양식이 현대에 재현·재해석되거나 다시 유행하는 것) 스타일을 보았다. 그는 이를 ‘촌스러움과 최신 유행의 경계에서 발견되는 멋스러움’이라고 표현했다.

비비안 탐이 쓴 <중국풍>은 경계인이 잡아낸 중국 문화와 디자인에 관한 개성 있는 에세이집이다. 아홉 가지 한자를 모티브로 삼아 각 글자의 의미와 더불어 자신의 체험적 삶을 통해 중국 문화를 해석하고 표현해내는 게 각별하다. 각 장의 제목 역할을 하는 삼(衫), 희(囍), 호(好), 열(熱), 통(通), 명(明), 청(淸), 시(市), 융(融) 등 아홉 글자는 능히 중국풍을 상징할 만하다.

패션 디자이너여서인지 시작과 마무리 모두 청삼(靑衫)이다. 유니섹스 의상으로 출발한 청삼이 가장 여성스러운 드레스로 변천하는 역사가 감미롭게 묘사된다. 청삼은 과감한 시도와 사회적 엄격함이 혼조된 형태이며, 자유와 구속이 혼합된 행태이기도 하다고 지은이는 풀이한다. 청삼은 중국의 아름다움을 서양의 라이프 스타일과 교직해 섹시하고 고전적인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서양 여성들은 청삼이 진짜 중국다운 것이라고 말한다. 청삼을 입으면 더욱 침착하고, 교양 있으며, 우아하고, 관능적인 느낌을 경험하면서 자신의 몸을 한결 더 의식하게 된다고 한다.

한때 거세게 불었던 마오쩌둥 패션 열풍에 대한 소묘도 감흥이 돋는다. 패션을 거부하는 개념의 패션, 그것이 바로 마오 패션이었다. 모든 사람에게 한 가지 의상을 입히고 모두 평등하게 만들겠다는 개념은 존재의 모든 차이를 덮어버리겠다는 시도에서 비롯됐다.

마오 슈트는 사실 중국적인 것이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마오 슈트가 1912년 중화공화국을 세웠던 쑨원 슈트를 기초로 했으며, 쑨원은 독일 대학생의 옷에서 영감을 얻어 디자인한 일본 남학생 교복 디자인을 본떠 그 슈트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의 이미지를 예술작품에 적용시킨 최초의 중국 예술가인 짱홍투와 비비안 탐의 ‘마오 콜렉션’은 일종의 성상 파괴다. 변발을 한 마오, 피터 팬 칼라와 깅엄(줄무늬나 바둑판무늬의 면포) 드레스를 입힌 ‘어린 마오’, 신부복 칼라를 입힌 ‘거룩한 마오’, 립스틱을 바른 ‘미스 마오’, 어두운 최면 안경을 씌운 ‘사이코 마오’ 등이 처음 선보였을 때 반응이 매우 상반되게 나타났다.

이 책을 관통하는 현대 중국 문화의 혼성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융(融)의 대표주자는 칭글리시(Chinglish)다. 홍콩에서 기이하게 결합된 중국어와 영어의 하이브리드인 칭글리시는 단순히 언어 수준을 넘어 일종의 라이프 스타일이 됐다. 문화의 혼효로 말미암아 새로운 것이 탄생한 대표적인 또 하나의 사례가 무협영화다. 중국 무예와 전통 사상이 할리우드 영화 스타일과 버무려져 새로운 문화상품으로 거듭났다.

중국 전통사회에서는 동성애가 현재보다 널리 용인돼 폭넓은 성적 자유를 구가했다는 사실도 이 책에서 밝혀진다. 홍콩에서는 80년대 후반부터 ‘통씬리엔’(同性愛) 대신 ‘통쯔’(同志)라고 부르는 것도 특이한 흐름의 하나다.

희(喜)자를 한꺼번에 두 개를 사용해 결혼의 기쁨을 하나로 표현하는 것은 ‘좋은 일은 늘 쌍으로 온다’는 중국 속담이 반영된 것이다. 저자는 결혼 의상을 디자인하면서 홍콩에서는 청첩장, 케이크를 포함해 결혼과 관련된 모든 것을 밝은 빨강으로 장식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털어놓았다.

이 책은 독특한 스타일로 쓰고 편집됐다. 문화와 철학이 가미된 소양과 비평 외에 전문가와의 인터뷰가 곳곳에 곁들여진데다 150여점의 사진, 전통 회화, 콜라주, 그림 자료 등 수려한 도판이 있어 시각적인 효과도 넘쳐날 정도다. 활력 있고 결곡한 글맛도 물론 상당하다. 이원제 옮김. 2만2000원